Who is in Wonderland (전자목록) [어마금]
Who is in Wonderland
-어마금 전자목록(미사카 미코토×인덱스)
-원작하고는 관계없는 2차 연성입니다. 독자적인 캐 해석 있습니다.
BY. 선풍기(coka0708)
나중에 생각해보니 놀라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었으나
그 당시엔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루이스 캐럴-
◆J.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촤악-
미코토는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던 하얀 커튼을 양 끝 쪽으로 쳤다. 바닷가라 그런 걸까,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부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 푸른 소금기와 금빛의 모래가 섞인 바닷바람이 싫다는 얘기는 아니었지만.
“날씨 좋네...”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다 같이 놀러 가자고 제안했던 건 다름 아닌 그녀의 후배 쿠로코였다. 그 녀석이라면 분명 단둘이 가자고 하거나 아니면 다 같이 가자고 해놓곤 두 명이서 가는 거로 (지어냈을 게 분명한 허무맹랑한 변명을 바탕으로) 만들거나 했을 텐데, 정말로 다 같이 가는 거라 미코토는 조금, 아니, 사실은 꽤 놀라 있던 참이었다.
‘게다가 각각 개인실이라니 쿠로코, 힘 좀 썼나 본데?’?’
하얀색과 하늘색으로 이루어진 깔끔한 분위기의 방은 샤워룸이 딸린 화장실, 부엌, 침대와 작은 발코니까지 달려 딱 봐도 고급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조용하고 느긋하게 보내자면서 일부러 호텔이 아닌 별장으로 왔다고 그랬는데, 확실히 이곳의 바닷가는 관광지보다는 휴양지의 느낌이 강했다. 미코토는 두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당장 눈앞에 시원한 바다가 있다고는 하나, 자동차에 배까지 상당한 거리를 온 터라 아마 다들 피곤해하며 각자의 방에서 쉬고 있을 것이었다. 사텐 같은 경우는 아마 맨 먼저 침대로 다이빙한 건 아니려나?
피식, 웃으며 미코토도 대충 짐을 정리하곤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는 창문과는 약간 비켜져 있어 바람이 오지 않았다. 침대 위의 에어컨을 켜기 위해 리모컨을 찾던 미코토의 눈에 문득 목이 긴 선풍기가 눈에 들어왔다. 모든 것이 새것처럼 반짝거리는 이 방에서, 유난히 그것만 도드라져 세월의 빛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분명 에어컨을 켜는 것이 효과적일 것임에도, 미코토는 그냥 그 선풍기를 틀었다. 미약하게 프로펠러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선풍기가 바람을 내며 미코토의 달 띤 뺨과 머리칼을 훑어 내였다. 요즘도 이렇게 프로펠러로 돌아가는 선풍기가 다 있구나. 바깥과 2, 30년은 기술의 차이가 있는 학원도시에서 지내온 미코토로서는 그것은 구식을 넘어 가히 유물로까지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어찌 되었건 땀으로 젖어 끈적했던 몸에 그것은 괜찮게 느껴졌으므로, 그녀는 그냥 눈을 감고 바람을 만끽하고 있던 참이었다.
“저기 단발.”
아마 그래서 일거라고. 미코토는 후에 그렇게 회상하곤 했다.
“혼자서만 바람을 독차지하고 있는 건 많이 불공평할지도.”
더위는, 가끔 사람을 미치게도 만드니까.
“하?”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에 미코토가 고개를 돌리면 자신과 얼마 떨어진 곳에서 흰 수녀복으로 온몸을 꽁꽁 둘러싼, 은발의 수녀가 볼을 있는 대로 부풀리며 서 있었다.
“너...”
“더워! 정말, 분명 그 ‘선풍기’라는 기계에는 ‘회전’이라고 하는 평화를 위한 기능이 있었을 텐데? 단발은 바보라서 그것도 모르는 거야?”
미코토가 갑작스레 나타난 수녀에게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쪽에서 다다닷 연발총을 쏴대며 성큼성큼 걸어와 자신의 앞에 섰다. 팔짱을 끼곤 자신 앞에 그림자를 만들어낸 조그만 수녀는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데도 상당한 위압감을 가지고 있어, 미코토는 자기도 모르게 슬쩍 몸을 뒤로 뺐다.
“이렇게 되면...”
‘뭐야? 뭘 하려는 건데?’
자신이 뒤로 움직이자 수녀가 자신을 따라서 몸을 앞으로 쑥 내미는 턱에 미코토는 졸지에 수녀에게 덮치는 형상처럼 되어 버렸다. 뭔가 점점 얼굴에서 열이 오르는 감각에 참지 못하고 미코토가 눈을 질끈 감아버린 그때, 딸깍. 하고 허무한 소리가 들린 후 인기척이 거둬졌다.
‘아, 그냥 회전을 눌렀을 뿐이구나...’
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미코토 옆에 풀썩, 자리 잡고는 이제야 살겠다는 둥 과장을 늘여 놓는 하얀 수녀. 아니 그래 그것보다 먼저 따져야 할 게 있었지!
“그보다 너, 왜 여기 있는 거야?”
“왜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된다는 식의 말투인 건데?”
“어? 그야 여기는...”
미코토는 생각했다. 이곳은 쿠로코가 빌린 개인 별장이다. 쿠로코는 여름을 맞아 ‘다 같이’ 놀러 가자고 말했었다. 그녀가 말했던 ‘다 같이’에 검은 성게 머리 소년 네가 포함되어 있었나? 쿠로코는 그를 잘 모를 텐데? (뿐더러 후배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네가 불렀잖아.”
미코토의 사고를 깨트리려는 듯, 맑고 청랑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을 타고 울렸다.
“뭐?”
“네가 날 여기로 불렀다고 했어.”
내가? 너를? 미코토는 두 눈을 크게 뜨곤 깜박거리며 손가락으로 자신과 수녀를 번갈아 가리켰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린 흰 소녀는 푹, 침대에 그대로 대자로 누워버리곤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배고파~ 단발, 뭔가 먹을 거 없어?”
참내, 어이가 없어서는... 미코토는 투덜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이라고는 하나 식당이 따로 있어 방마다 미리 요깃거리까지 준비해놨을지는 잘 몰랐지만. 음식이 없으면 없는 대로 저 귀찮은 녀석을 돌려보낼 수 있으니 그것도 나름 좋지 않을까, 하고 미코토는 생각했다.
그래도 가능하면, 뭐라도 먹이고 돌려보냈으면 좋겠네. 막연히 그런 문장을 떠올리며, 미코토가 냉장고 문을 열어보려고 할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리며 적갈색의 긴 곱슬머리 트윈테일을 흔들거리며 쿠로코가 들이닥쳤다.
“언니! 짐 정리는 다 하셨나요? 혹시 옷 갈아입는 게 힘드시다면 이 쿠로코, 성심성의를 다해, 언니를 위해 이 한 몸 다 바쳐 도와드릴 수 있는데 말이죠!”
“우아앗!! 허락도 없이 들어오면 어떡해?”
다짜고짜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는 후배가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도, 미코토는 언제나 그녀의 행동에 당황하곤 했다.
“하지만 이 쿠로코, 언니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 제대로 노크는 하고 들어왔는걸요? 언니가 옷을 갈아입을 때가 아니라 아쉬웠지만...”
“쿠로코...”
입가를 경련시키며 파지직, 이마 위로 파란 전기를 내비치자 능청스럽게 쿠로코는 텔레포트로 쏙 빠져나왔다. 후, 그래. 오늘은 여행을 온 거고, 그 여행길에는 이 돼먹지 못한 후배가 많이 힘써줬으니까. 한숨으로 상황을 마무리한 미코토는 마침 잘됐다 싶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말이야, 여기 누구누구가 와 있는 거야?”
“네...?”
미코토는 얼빠진 채 자신을 바라보는 쿠로코를 눈치채지 못한 채, 냉장고 문을 열며 다시 입을 연다.
“아니, 방금 전에 그 녀석의 하얀 수녀가 말이지, 갑자기 여기 들어와선 먹을 게 없냐고 물어서 말이야.”
역시, 물밖에 없네. 적막한 냉장고 안의 주황빛을 보곤 미코토가 중얼거렸다.
“분명 다 같이 왔던 거로 기억은 하는데... 그 녀석들까지 왔는지는 기억이...”
무심코, 정말 생각했던 바와는 상관없이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미코토는 알아차린다. 자신을 어딘가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쿠로코와 순간적으로 뒷목 부근이 서늘해지는 감각을.
어라? 어딘가가 이상했었나? 어디부터 이상했었지? 아니, 애초에, 왜 자신은....
미약하게 떨리는 손을 이마 위에 얹으며 미코토는 시선을 쿠로코에게로 돌린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아이, 언니도 참!”
말끝이 떨려오는 미코토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는 듯이, 쿠로코가 평소처럼 말하며 미코토의 어깨를 탁! 쳤다. 약한 충격이었으나 몸에 힘이 풀려 있던 터라, 미코토는 그만 몸의 균형을 놓쳐 잠시 흔들거렸다.
“쿠로코랑 함께 있는데 그 유인원... 아니, 그 신사 분 생각뿐이라니! 언니를 바라보는 수많은 학우들의 통곡소리가 신경 쓰이지 않으신가요? 아아, 금단의 사랑과 도주라니! 쿠로코는.. 언니만을 바라보는 쿠로코는...!”
“뭐...뭣?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 가득한 후배의 말에 미코토가 소리를 지르자 가련한 여주인공처럼 바닥에 쓰러져 앉아 흑흑, 우는 시늉을 하던 쿠로코는 손으로 가리고 있던 입가를 씩 올렸다. 이 녀석, 즐기고 있는 거지?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는 뜻을 담아 한 손에 파직, 전깃불을 일으키니 그제야 쿠로코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분들이라면 우연히, 경품에서 여행권이 당첨되어서 저희와 같은 여행지로 오게 된 것이었잖아요.”
“어라, 여기 쿠로코 너의 사유지가 아니었던가?”
“별장은 쿠로코가 빌린 것이 맞습니다만, 이 해변은 딱히 그렇지는 않답니다. 아무래도 그분들은 이 옆의 호텔에서 묵으신다 하더군요. 이곳으로 오는 배에서 그렇게 말했었어요. 정말, 언니와 오붓하게 보내기 위해 사람이 얼마 없는 곳을 찾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건만! 그 유인원은 그걸 경품권 하나로 간단히...!”
아, 그랬구나.
까드득- 쿠로코가 이를 갈며 분통을 터트리는 뒷말은 무시한 채, 미코토는 그녀가 준 정보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배에서 그 둘을 만난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너무 피곤해서 그만 잊어버리고 있던 걸까? 아니면 갑자기 자신의 방에 나타난 흰 수녀에게 평소보다 더 놀라고 말아서 그랬던 걸까. 어느 쪽이던, 저 애가 지금 여기에 나타난 것이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쿠로코 우리 점심? 아니 저녁인가? 여하튼 밥은 언제 먹어?”
“음, 저녁 시간은 7시로 정해져 있어서, 그때까지 기다리셔야만 할 거예요. 셰프가 정해진 시간에만 음식을 하기로 되어 있어서... 정 배가 고프시다면, 쿠로코랑 같이 차를 타고 이 근처로 나가볼까요? 편의점 정도는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요...”
“음... 그렇게 할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미코토를 보며 쿠로코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부신 것을 오랫동안, 천천히 보기 위해서인 것처럼.
“... 죄송해요. 언니. 호텔을 예약했으면 룸서비스를 시켜서 굳이 밖으로 다시 안 나가도 되었을 텐데.”
“응? 왜 그걸 쿠로코 네가 미안해? 난 여기가 좋아. 시원하고, 조용하고.”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미코토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팔을 올려 가볍게 쿠로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언제나 자신에게만 너무 무르다는 것. 너, 그것도 안 좋아. 그런 자신의 마음이 잘 전해졌는지는 몰라도 쿠로코는 그저 다정히 웃어만 보였다. 눈앞의 미코토를 따라 하는 것처럼.
“씻고 옷 갈아입고 나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언니! 그런 거라면 부디 이 쿠로코에게! 맡겨...”
“금! 방! 나올 테니까, 밖에서! 기다려!”
다시금 평소처럼 자신에게 달려드는 후배의 이마를 한 손으로 문 밖까지 밀쳐 보내고는, 미코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런 점도 이제는 좀 고쳐지면 좋을 텐데 말이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창문을 닫고 다시 커튼을 친 뒤 샤워를 하기 위해 윗도리를 막 벗으려던 참...
“사이좋아.”
침대 쪽에서 심퉁스런 목소리가 들려와 미코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너, 너...너... 아직도 있었어?”
“사이! 좋아 보이네!”
동문서답을 하며 침대에서 내려와 쿵, 쿵 일부러 발자국 소리를 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수녀에게 그만 압도당했는지, 미코토는 벗으려던 윗도리도 스르륵 놓아버린 채 얼떨떨한 표정으로 수녀와 눈을 마주쳤다. 이국의 보석처럼 흐릿하면서 선연하기 빛나던 녹안은 어쩐지 자신의 주인이 다른 개체에게 먹이를 주는 걸 보고 만, 길들인 동물의 배신감 비슷한 무엇이 느껴졌다.
하지만 왜? 영문을 모르는 미코토로서는 일단은 똑같이 눈을 부라리며 바라보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뭐.. 뭔데??”
“그 이상하게 꼬불거리는 움직임을 하는 양갈레랑 말이지?”
“꼬불거린다니...”
풉,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버려 문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트윈 테일의 소녀에게 미약한 미안함을 느낀 미코토. 그러나 은발의 새하얀 수녀는 그녀의 웃음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뾰루 퉁한 얼굴로 다시 침대로 가선 미코토에게 등을 돌리고 누워 버린다. 왜 저러는 걸까? 아, 혹시 너무 배가 고파서 삐진 건가? 자기 나름대로의 추측을 해보며 미코토는 얼른 외출복으로 갈아입는다.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일단 너는 그 녀석에게 돌아가 있어.”
여전히 아무 대답이 없는 하얀 덩어리를 보며 미코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도 아니고, 어떻게 자기에게 관심을 안 줬다고 삐질 수 있는지. 아 이제 나도 몰라. 쓸데없는 것에 신경을 쓰느라 에너지를 쓴 걸까. 자신의 배도 고파오는 걸 느낀 미코토는 쿠로코가 기다리는 문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잘 다녀와.”
막, 그녀가 문고리를 열기 직전 항복 깃발을 흔드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어쩔 수 없구나. 고개를 돌리면 ‘인사는 해주겠지만 아직 내 마음은 풀어지지 않았다’란 눈빛으로 도도하게 침대에 걸터앉은 수녀가 한 명.
“응. 다녀올게.”
하지만 알고 있어. 내가 문을 나간 후에, 넌 다시 웃어 줄 거잖아?
◆A. 어제의 이야기, 아무 의미 없는
소녀와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곳은 사방에 아무것도 없는, 깊고 깊은 구덩이 안이었어요. 그래서 소녀와 소녀는 서로 자신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래서 나는 어제를 기억할 수 있게 되었어. 그는 내게 과거를 기억하는 미래를 준 거야.”
“그래서 나는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어. 그는 내게 새로운 미래를 준 거야.”
그랬구나. 그랬어. 소녀와 소녀는 그동안 몰랐었던 서로에 대해서 아주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답니다. 둘은 많이 달랐고, 그 이상으로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싸우는 날도 많았고, 다시 손을 잡는 날도 잦았어요. 아주 드물게는 같이 등을 맞대고 조용히 눈물로만 대화를 한 날도 있었지요.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소녀와 소녀는 조금씩 지쳐갔습니다. 둘이어서 견딜 수 있었으나, 둘이여서 견딜 수 없는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과연 두 소녀가 견딜 수 없었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공복? 생리현상? 아니요.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는 신기하게도 배고픔도, 목마름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들은 마치 태초의 신처럼 살아갈 수 있었답니다. 무엇도 부족하지 않은 상태란, 곧 몸이 무엇도 원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말이니까요.
두 명의 불행은 그들이 인간이었다는 것이었어요. 인간이었기에 느껴지지 않은 욕구에 그리워했고, 사람이었기에 멈춰버린 생리현상에 갈망했어요. 무엇보다, 둘을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굳지 않은 추억들이었어요. 과거를 기억했기에 소녀와 소녀는 괴로워했고, 절망했으며, 그것을 숨기려 드는 서로에게 분노하고, 슬퍼했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한 소녀는 생각했어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한다면, 어쩌면...
‘어쩌면 기억하고 있는 것들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만 된다면, 소녀와 소녀는 더 이상 둘이 함께 있으면서 외롭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K. 아무것도 아닌 날 축복하기
파라솔 밑으로 들어오고 나서야 미코토는 이제야 산 듯이 숨을 한껏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한가한 바다의 파도 소리와 함께 사텐, 우이하루, 쿠로코가 시끌벅적하게 비치발리볼을 하는 소리가 느긋이 섞여 들고 있었다. 쿠로코가 공을 우이하루에게 던지는 소리, 우이하루가 넘어지며 ‘이, 이건 반칙이에요!’라고 외치는 소리. 슬며시 눈을 뜨면 가볍게 텔레포트로 제자리로 돌아오는 듯한 쿠로코가 보인다. 그렇군, 반칙이네. 미코토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불쌍한 우이하루를 위해서라면 그녀가 가서 가세해야 되겠지만 어째서인지 그럴 기력이 나지 않았다. 자신의 안색을 살핀 사텐이 잠시 파라솔 밑에서 쉬라고 권유하여 이곳에 왔지만, 역시 미코토도 조금은 아쉬웠다. 기껏 놀러 온 건데, 둘째 날부터 이러다니. 어젯밤 잠을 좀 설쳐서 피곤이 가시지 않은 탓일까. 미코토는 자신의 목을 두어 번 좌우로 꺾곤 팔을 앞으로 쭉 내밀어 기지개를 켰다..
꿈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으나 어딘가 꺼림칙한 내용이었다. 아주 작은 벌레들이 자신의 위로 기어 다니며 온 몸을 뒤덮은, 그런 불쾌한 감각에 눈이 떠졌으니까. 정신은 눈앞에 있는 바닷물만큼 맑았는데도, 몸 여기저기가 찌뿌둥한 걸 보면 어쩌면 원인은 수면 부족이 아닐지도 몰랐다. 혹시 더위를 먹은 건가. 나름 건강에는 자신이 있는 편인데. 비치백 안의 물통을 꺼내 입술로 가져가자 입 안 가득 느껴져야 할 시원함이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미코토는 비치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장은 바로 요 옆에 있었으니 별로 힘 들일 건 없었다.
“쿠로코! 모두들! 나 잠시 물 좀 가지러 갔다 올게!”
“언니! 저를 두고 어딜 가시는 건가요! 쿠로코도 같이...”
“어딜...! 승부는 다 끝내고 가셔야죠!”
펄쩍 뛰어오른 사텐에게 미처 대비를 못하고 그대로 깔아뭉개진 쿠로코를 보며 미코토가 아하하, 크게 웃었다.
“괜찮아! 얼른 다녀올게!”
물을 가지러 부엌으로 간 순간, 미코토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껴 한 손으로 벽을 짚었다. 속이 매스껍고 눈앞이 핑, 도는 느낌에 미코토는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바로 섰다..
‘어라? 오늘따라 왜 이런담. 아무래도 쉬어야 하나.’
당황하는 사용인한테는 잠시 더위를 먹었다고 변명하며, 마실 것을 모두에게 전해 달라는 말을 부탁하곤 자신은 방으로 돌아왔다. 금방 돌아가겠다고 그랬는데. 막상 자신의 방으로 오니 괜찮아진 느낌도 들어서 뭔가 더 억울했다. 다시 나가볼까, 아무래도 자신의 소식을 들으면 모두 다시 돌아올 것 같으니까.
조금만 바람을 쐬고, 다시 내려가야지. 미코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어컨 리모컨을 집었다가, 갑자기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 또다시 미약하게 두통이 올까 봐 그냥 옆의 선풍기의 버튼을 눌렀다.
‘은근히 써먹네 이거...’
“단발, 괜찮아?”
옆에서 투명하게 퍼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작고 하얀 은발의 수녀가 보였다.
“더위 먹은 거야? 물은 마셨어? 더위를 먹으면 일단 수분 공급이 중요하다고 토우마도 말했을지도.”
“너.. 너?왜 또 여기 있는 거야?”
자신의 이마에 손을 대보더니 수녀의 옥빛 눈동자가 의문을 띄며 갸웃거린다.
“말했잖아? 불러져서 왔다고.”
“불러져서?”
설마 자신의 상태가 나쁘다는 걸 안 다른 사람이 그녀를 보낸 걸까? 그렇다면 누가? 쿠로코.. 는 아닐 테고, 우이하루와 사텐은 저 애를 잘 모를 텐데? 서, 서.. 설마 그 녀석이? 아니, 그 녀석이라고 쳐도, 어떻게 알고?
거듭되는 혼란에 눈앞이 팽팽 돌아가는 미코토의 뺨에 문득 찬 기운이 느껴졌다. 냉장고에 있는 생수를 꺼내 얼른 자신에게 내미는 은빛의 소녀와 눈이 마주치자 미코토는 괜히 목만 더 말라져 왔다.
“자! 단발! 빨리 마셔! 안 그럼 삐쩍 말라서 미라처럼 되어 버릴지도!”
“더위 좀 먹는다고 미라가 되진 않거든?”
다급했던 목소리에 고마움을 전하려니 막상 튀어나온 건 역시 귀엽지 않은 자신이다. 뭐야 정말. 부탁한 적도 없는데 갑자기 나타나선 챙겨주고... 사람 기분 이상해지게...
입 밖으론 꺼내지 못할 생각을 하니 뭔가 점점 더 더위를 먹는 느낌이라, 미코토는 소녀의 손에서 홱 물통을 채가서는 식탁에 가 의자에 앉고는 벌컥벌컥 물을 마신다. 얼른 쪼르르 자신을 따라온 수녀에게는 애써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좀 천천히 마셔. 안 그럼 체할지도.”
“.... 괜찮아. 몸 하나는 튼튼하니까.”
“흥, 튼튼하다는 사람은 더위 먹어서 물놀이도 제대로 못 즐기곤 터덜터덜 돌아오지 않는데?”
“하아? 내가 언제 터덜터덜 돌아왔다고 그래? 완, 전! 잘 즐기고 왔거든?”
“그렇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래 봬도 나는 수녀라서, 간호쯤은 쉽게 할 수 있어. 단발도 넓은 의미에선 우리 아버지의 불쌍한 어린양이니까 특별히 간호해 줄 수 있을지도.”
“필요 없어! 애초에 그렇게까지 환자도 아니라니깐?”
그러고 보면, 얘와 그 녀석은 물놀이는 했나? 이왕 같은 곳에 놀러 온 거니까, 다 같이 놀았어도 좋았을...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뭘 중얼거리는 건데 단발? 역시 더위를 심하게 먹어서...”
“그러니까 아니라...”
“언니! 괜찮으세요?”
갑자기 텔레포트로 앞에 나타나서는 양 손으로 자신의 양 볼이며 이마며 목덜미까지 요리조리 살피는 쿠로코에게 미코토의 뒷말은 막히고 말았다.
“쿠.. 쿠로코?내가 들어오기 전에는...”
“언니!”
다짜고짜 와락- 자신을 껴안는 쿠로코에게 미코토는 또다시 할 말을 다 못 하고 말았다. 휴 한숨을 쉬며 자신은 괜찮다며 그녀를 밀어내려고 하면, 떨고 있는 쿠로코의 어깨와 마주하고 만다.
아, 이런. 이래서는 안 되는데. 이래선 안 되는 거였는데. 역시 그냥 괜찮은 척 나갔어야 했는데. 그렇게까지 심한 것도 아니었는데. 네가 열심히 계획한 여행이었는데. 너를 이렇게 두려움에 빠트릴 만한 일은 없어야 했는데.
“쿠로코... 나는 괜찮아.”
괜찮으니까- 아이를 달래듯 그리 말하며 쿠로코의 등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그러다 얼핏 신경이 쓰여 눈으로 그 하얀 수녀를 쫓자, 그녀가 있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어라...?’
얼른 고개를 돌려 이리저리 방을 둘러봐도 어느 부자 수집가의 찻잔처럼 보이는 수녀복이나 하늘에 은빛 물감을 묽게 탄 머리칼은 보이지 않는다.
“정말... 괜찮으세요?”
“그냥 가벼운 현기증일 뿐이었다니까?”
좀 진정이 됐는지 쿠로코는 겨우 미코토에게서 떨어져 그녀의 건너편에 앉았다.
“그렇게 말하시는 것치곤...... 언니,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걸로 보이시는데요? 역시 아직 상태가 안 좋으신 게...”
“응? 아, 아니야, 아니야! 정말 괜찮으니까! 저녁에 있을 바비큐 파티도 갈 수 있어. 배 엄청 고프니까 말이야, 나 기대하고 있었다고?”
능청스레 미소 지으며 말하는 미코토를 보고 나서야 쿠로코의 눈동자에 남아있던 불안감이 가셨다. 그제야 미코토도 어깨의 힘을 풀을 수 있었다는 건 비밀이었지만. 그래도 방금 전의 사태보단 좀 침착해진 상태였다. 울먹거리는 우이하루와 구급차를 불러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었던 사텐이 한꺼번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서는 난리도 아니었으니.
‘그 앤? 그새 나간 건가...?’...?’
하지만 어떻게? 아니, 그래도 자신에게 인사는 하고 갈 수는 있었는데. 병간호를 해주겠다고 난리를 피웠으면서 어떻게 자기 몰래 그렇게 없어질 수가 있지?
울컥,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분의 이유도 모른 채, 미코토는 눈가를 찌푸리고 한 손으로 제 턱을 괴었다.
“그래도 언니, 몸이 안 좋으시면 다음부턴 꼭 이 쿠로코에게 얘기를 해 주세요.”
“별 거 아니었다니까. 좀만 쉬었다가 다시 가서 해수욕하려고 했는데?”
흠칫, 미코토는 식탁 밑의 제 무릎에서 무언가 천이 스치는 감각이 들어 몸을 떨었다. 시선을 힐끗 아래로 옮긴 그녀가 몸을 움찔거리며 의자를 덜컹거리자 쿠로코도 의문스레 미코토 쪽을 바라봤다.
“언니? 왜 그러세요?”
“어? 응? 아-아무것도?”
더 의뭉스레 찌푸려지는 쿠로코의 미간에 미코토는 하하하, 웃으며 얼른 다시 의자를 식탁 쪽으로 당겨 앉았다.
“어쨌든, 앞으론 꼭 얘기할게.”
“네, 꼭 부탁드려요. 그리고...”
“그, 그러고 보니 오늘 저녁에 있을 바비큐도 그 요리사가 준비하는 거야?”
급하게 화두를 바꾸었는데도 쿠로코는 성실하게 오늘 오후의 일정을 알려주었다. 눈빛은 여전히 개운치 못한 것 같았지만, 미코토에겐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왜 여기 있는 거야!
쿠로코가 다른 곳을 보는 사이 얼른 식탁 밑으로 고개를 숙여 열심히 입모양으로 의사 전달을 한다. 바로 자신의 무릎 위에 양 팔을 겹쳐 올리곤 머리까지 슬며시 올려놓은 은발의 수녀에게. 미코토의 소리 없는 외침이 들렸는지, 수녀는 슬 고개를 돌려 미코토의 눈동자를 바라본다. 그 움직임에 그녀의 긴 머리칼과 천 자락이 다리를 간질여서 미코토는 자신도 모르게 발가락을 오므렸다 피며 입술을 우물거렸지만. 얼른 떨어져. 다시 또박또박 소리 없이 말하면, 수녀는 입술을 삐쭉 내민다. 아니 이게? 분명히 알아들었는데, 확실히 눈이 마주쳤는데! 그것은 명백한 의사소통 거부였다.
하는 수 없이 강경책으로 한쪽 무릎을 들썩거려 보면 이번엔 수녀 쪽이 균형을 잃어선 상체를 비틀거린다. 어때? 이제 좀 떨어질 맘이 생겼나? 승리의 미소를 짓자 볼을 있는 대로 크게 부풀리는 수녀. 뭐야. 그런 표정 지어도 소용없어. 승부의 세계는 냉혹했다. 수녀가 무릎에서 팔을 빼자 미코토는 허리를 쭉 폈다. 아, 긴장했네.
“그래서 아마 벌레 같은 건 걱정 안 하셔도 될 거예요.. 그리고 밤에는... 잠깐만, 언니, 듣고 계셔요?”
“어? 아아- 물론이지! 다 들었, 히익?”
“언니?”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하하..그래서 밤에는 뭘 한다고?”
이제는 명백히 이상한 기색의 미코토였지만 쿠로코는 잠시 그녀를 쳐다봤을 뿐, 충실하게 대답했다. 미코토가 다시 식탁 밑으로 눈을 돌리면, 양 팔로 그녀의 다리를 꽉 안은 채 턱을 다리 사이에 대곤 한껏 약이 오른 다람쥐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파릇한 눈동자 두 개가 보였다. 베- 혀를 살짝 내밀고는 한 글자 한 글자 입 모양을 크게 벌려 말하는 다람쥐.
절 대 로 안 떨 어 져
흥,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도 여전히 미코토의 다리를 껴안은 채다. 아 진짜 제발 좀... 미코토는 이젠 다리뿐만 아니라 가슴께까지 간지러운 느낌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불꽃놀이를 하기로 했답니다. 사텐 상이 하도 기대를 하셔 가지고...... 정말 애도 아니고 말이죠. 언니? 얼굴이 새빨갛게 되셨는데... 정말 괜찮으세요?”
“어?”
반사적으로 자신의 뺨에 손을 대보니 쿠로코의 말대로 홧홧함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아예 자리에서 쿠로코가 일어나자, 미코토는 깜짝 놀라 얼른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아니! 역시 아직 조금 어지러울지도 모르겠네!”
“네? 그럼 얼른 병원에...”
“아니! 괜찮아! 그.. 그냥 좀 누워 있으면 될 것 같으니까!”
“언니?”
“그.. 그러니까... 잠시만 혼자 있게 해 줄래?? 저녁때까진 꼭 내려갈 테니까...”
“....”
역시 안 되려나? 미코토는 레벨 5의 머리를 굴려 쿠로코가 자신의 다리 밑의 흰 수녀를 보았을 때의 반응과 그에 대한 대처를 생각해보았다.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낸다면 아직 괜찮지만... 대성통곡한다던가 충격에 기절해버린다던가 그러면... 어쩌지...’
“네. 알겠어요.”
“어?”
예상외의 반응에 미코토가 벙한 표정을 짓는 걸 몰랐을까? 쿠로코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잠- 쿠로코?”
“그럼 저녁 시간에 봬요. 언니-”
달깍.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고 방 안은 순간 고요해졌다.
“... 괜찮아. 단발.”
“뭐야. 왜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건데.”
스르륵- 자신의 다리를 안고 있던 팔들이 풀어졌다. 미안한 줄은 안 모양이지?... 하긴? ... 별로 너 때문도 아니긴 하지만.
“그 여자는 항상 당신의 편이니까.”
“... 뭐?”
“그러니까 믿고 기다려 줄 거야. 당신이 돌아오는 것을.”
“....”
그게 무슨 뜬 구름 잡는 소리야. 그러나 미코토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아냐는 반박도 내보일 수 없다. 아래를 보면, 식탁 밑에서 조금 옆으로 튀어나온 수녀의 흰 옷자락과 조그만 손이 보인다. 아마도, 무릎을 모아 세워 거기에 팔을 겹쳐 올려두고 있는 걸까. 몸을 동그랗게 감싸 자신을 지키려 드는 공벌레처럼. 누구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 내가, 쿠로코의 기대를 망쳤으면 어떡하지?”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리라는 건, 단발이 제일 잘 알고 있잖아.”
그렇지만. 그래도.
그런 표정을 짓게 해 버렸잖아.. 꾹꾹 눌러서 참는 표정. 터트리면 당장이라도 무너져버릴 듯한, 무겁고 무거운 표정.
“그렇다면, 일단은 웃어주면 되지 않을까.”
식탁 옆으로 보이던 하얀 옷자락이 보이지 않는가 싶더니, 어느새 수녀는 자신의 뒤로 와 있었다. 하얗고 금실의 자수가 박힌, 단정한 수녀복이라기엔 오묘하게 화려한데도, 분명히 성스러운 따스함을 지닌 옷자락. 그 옷자락이 살포시 자신의 어깨를 껴안는다. 위로라도 해줄 심산인 걸까.
그렇게까지 침울해하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미코토는 그 흰 천에 자신의 손을 올린다. 말로 표현하는 건 아직 서투르니까. 자신도, 소녀도.
“평소처럼... 그렇게 웃어주면 된다고 생각해.”
그런 점에선 나도 그 양갈레랑 똑같거든. 살며시 자신의 귓가에 비밀처럼 속삭여진 문장을, 미코토는 못 들은 척 고개만 끄덕였다.
♠2. 길을 잃은 이야기.
A와 A′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있었다. A는 자신의 뛰어난 상상력으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자신의 회상들을 불러 놓았다. A는 그것을 A′와 손을 잡아 공유했다. A′의 기억은 현실처럼 생생했기에, A는 A′의 기억을 토대로 보다 사실적인 회상들을 구상할 수 있었다.
곧 텅 비어있던 세상은 그들이 구현해낸 ‘과거’들로 가득 찼다.
둘은 식욕을 느껴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며, 수면욕을 느껴 푹신한 침대에서 잤다. 나뭇잎 사이로 흩어지는 햇살의 빛과 온도, 불어오는 바람의 감촉까지도 느꼈다. 모든 것이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단 한 가지, ‘인간’이 A와 A′밖에 없다는 걸 빼면.
둘은 서로 계약을 맺었다. 절대로 서로의 추억 속에 있는 사람을 구현하지 말자고. A와 A′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미래는 미지수였다. 언제로 가게 될지 또한 미정이었다. 알 수 없는 가상의 숫자. 그들이 바깥으로 나갔을 때 그들이 알던 세상이 먼 미래일지, 가까운 과거일지, 역사의 뒤안길 일지,, 상상도 할 수 없는 아득한 미래일지. 전혀, 알 수가 없던 것이다.
그래서 A와 A′는 맹세했다. 절대로, 자신들의 회상 속 인간들을 불러오지 말자고. 서로에 대한 유일한 신뢰를 걸고, 어길 시 두 번 다신 서로와 이야기할 수 없을 거란 두려움에 기대서.
만일 불러온다면, 그것은 감정을 증폭시킬 거야. 그리고 이 현실을 견디지 못하게 되겠지. 하지만 여기서 나갈 수는 없어. 그러면 어떻게 될까?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여기서 절망하며 살거나 죽은 채로 살거나. 둘 중 하나겠지만. 아마 우리는 이곳을 바깥과 동일하게 만들려고 하겠지. 불가능했다면 모르지만, 가능하니까. 외로우니까. 그리우니까.
하지만, 그래선 여기서 영원히 못 나가.. 나갈 의지를 잃어버리게 되어버려. 내가 아무리 문을 찾아낸다고 해도 소용없어져 버려.
A는 A′의 말을 이해했다. 전적으로 동의했으며, 깊이 공감했다. 그래서 얼마 동안은 괜찮았다.
얼마 동안,이라고 해도 정확한 기간은 몰랐다. 그들의 회상들이 구성된 공간은, 얼핏 보기엔 모든 것이 흘러가는 듯 보였으나 결국 아무것도 없는 공간 그대로였기에. 그래서 A는 생각보다 오래 버텼을 수도 있었다. 반대로, 얼마 못 견뎠을 수도 있었다. 모르는 일이었다. 확신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A가 결국 사람의 회상을 만들어냈다는 것, 그것만은 사실이었다. A가 불러낸 사람은 가족도, 친구도 아니었다. 자신을 바꿔주었던 단 한 명. A는 A′가 자고 있는 방을, 집을, 거리를, 마을을 빠져나와 그를 불러냈다. 아니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었기에, A가 멀리 간 곳이라고 생각했던 건 어쩌면 A′의 바로 옆이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A와 A′는 서로 닿지 않을 만큼 떨어져 있을 수도 있었고.
하지만 결국 A는 그를 불러냈고
A′는 A가 우는 얼굴을 목격했다.
그렇게, A와 R이 정해졌다.
♥Q. 증언대에 설 시간이야.
그날 아침 미코토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불쾌하고 생생한 꿈을 꿨고, 그것이 꿈이라는 걸 깨닫기 위해 억지로 눈을 떴을 뿐이었다. 바깥은 이미 환해 미코토는 잠시 아침과 새벽을 헷갈려했다. 여름은, 착각하기 쉬운 계절이구나.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며, 미코토는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아침바다의 상쾌함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정체 모를 불안도 잊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아- 그런 점이 안이하다는 거예요.”
“언니는 아직 퇴원한지도 얼마 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그걸 인지시키면 어쩌자는 거예요?”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만 해도 분명 그랬다. 그냥 어쩌다 한 번씩 꾸는 기분 나쁜 꿈을 풀어내려 기분전환을 하는, 일상의 연장선.
“흐음- 쿠로코상이 미사카상을 생각하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이 분야에서만큼은 제 의견을 믿어주지 않으면, 곤란한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미코토는 자신의 눈동자가 커지는 것을 느낀다. 살갗 위에 소름이 돋는 감각을 느낀다. 자신의 온 신경이 마비됨과 아직 몽롱했던 이성이 깨어남을 느낀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시기상조.... 어, 언니? 언제부터...”
도대체 왜, 쿠로코가 자신이 퇴원했다느니, 시기상조라느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들을
“.... 좋은 아침이네요, 미사카상-”
쇼쿠호 미사키랑 하고 있는 걸까.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미코토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잔뜩 구겨진 종이를 억지로 펴서 웃는 얼굴을 그린 모습. 그것은 불쾌함과 놀라움보다도 간절함이 깃든 모습이었다.
“쿠로코, 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야? 방금 그 말은 또 다 뭐고?”
“그, 그게... 언니,제, 제가 다 설명할게요. 그러니까 일단은...”
“아니, 난 지금 들어야겠어. 빨리, 설명해. 그게 다 무슨 소리야? 내가 퇴원한 지 얼마 안 됐다고?? 시기상조라는 말은 또...”
순간, 미코토가 보던 세상이 크게 휘청거렸다. 원근이 무너지고, 방향감각이 상실되고, 발밑은 출렁거렸다. 자신을 다급히 부르며 다가오는 쿠로코의 목소리도 어딘가 멀리서 들려왔다. 안 돼, 이대로 쓰러지면 영영 알지 못한 채야. 미코토는 이를 악 물고 일어선다. 아아- 하지만, 과연 이대로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좋은 걸까? 누군가 미코토의 안에서 그렇게 묻는다.
미코토는 일순 모든 것이 멈추어진 느낌을 받는다. 일시정지를 누른 것처럼, 자신이 알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낯설어지는 감각. 안되는데, 아직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그래, 바람. 바람을 쐬면 좀 나아질 거야. 그 바람에 흩날리는 은발을 본다면. 무심코, 미코토는 손을 뻗는다.
“괜찮아요- 미사카상.”
하지만, 닿은 건 하얀 장갑을 낀 손의 감촉. 보이는 것은 샛노란 별빛, 안타까움이 빛나는 눈동자. 들리는 건 타이르는 목소리. 잘못한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상냥하고 부드러운.
“다- 괜찮아요.”
그리고 느껴진 것은
파지직! 미코토의 몸에서 스파크가 터졌다. 그것에 튕겨지듯 쇼쿠호 미사키는 미코토에게서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미코토는 제 뒷목에 손을 대었다. 툭, 하얀 장갑이 떨어진다.
“너...!”
으르렁, 자신의 보금자리를 침범받은 야생동물처럼 미코토가 쇼쿠호를 노려본다. 정작, 그런 눈빛을 받은 쇼쿠호는 가만히 서서 미코토를 바라볼 뿐이다. 반짝였던 별이 흔들린다. 도대체 무엇으로? 조금 벌어진 입술은 그녀의 크게 놀란 듯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생글거리는 가면을 썼던 쇼쿠호의 얼굴에 비친 것은
“미사카상.. 당신...”
당혹? 동정? 아니면,
“왜..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깊은 슬픔?
한 발짝, 쇼쿠호가 미사카에게 다가왔다.
“오지 마!”
파지직! 지신과 쇼쿠호 사이에 스파크가 튀자 오히려 놀란 것은 미코토였다. 나는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지? 미코토는 눈을 깜빡여 뒤의 쿠로코를 본다. 쿠로코는, 자신을 위해 이번 여행을 계획했던 사람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한다. 어떻게든 자신을 안도시키려는 미소.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미코토에게로 다가간다. 이미 깨져버린 유리컵 조각을 그러모아 보려는 몸짓이었다. 날카로운 유리조각에 피에 물들여가는 손보다는, 어떻게는 유리컵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겠다는 절실함. 쿠로코는 제 두 손을 가슴께에 모야 꽉 쥔다. 그리하면 떨림을 숨길 수 있다는 듯이.
하지만, 쿠로코는 안다. 자신의 선배가 이런 걸로는 속아주지 않을 거란 사실을. 미코토도 안다. 자신의 후배는 절대로 자신을 위험에 빠트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시라이 쿠로코가 미사카 미코토에게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은 분명 그 진실이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것.
그래도, 쿠로로. 너는, 너는 알고 있잖아.
미코토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바로 한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시각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을 믿는다. 젤리처럼 흔들리는 공간에 전기파를 내보낸다. 왜곡된 표면을 바로 잡는다. 레일건이란 호칭, 그것만은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 탁. 미코토는 난간을 잡고 계단을 오른다. 언니 미사카상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미코토는 계단을 오른다. 자신을 속이고 있는 자들을 피해, 바깥이 아닌 이 저택의, 자신의 방으로 달려간다. 바람만 쐬면 괜찮아질 거야. 왜? 한쪽에선 그런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미코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선다. 간곡하게, 신을 찾는 신도처럼. 비이성적인 자신이 누구보다 논리적인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처럼.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미코토는 서서히 눈을 뜬다. 암흑을 끼얹은 방안은 옅은 파도소리만이 들려왔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눈을 깜빡거리면 약간 쓰라림이 느껴진다. 자신이 울었던가. 방으로 들어오고 나서의 기억은 드문드문 끊어져 있다. 화장실에서 있지도 않은 속을 다 게워 내거나, 침대에서 하얀 시트를 꽉 움켜잡으며 소리 없이 울부짖었던. 그런 파편의 날이 아직도 자신의 심장을 건든다. 거의 기절하듯 쓰러져 있던 것 같은데도, 자신은 여전히 이곳에 있다. 그렇다. 시라이 쿠로코는, 자신의 사람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리는 없다. 그러나 미코토는 방문을 열지 못한다. 나가서 그들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해보라고 외치지 못한다.
어째서?
미코토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물음을 던진 자가 입을 다물자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미코토는 잔뜩 어깨를 움츠린 채로 입을 연다. 오지 마. 그렇게 외치기 위해. 말라 갈라진 목구멍은 소리를 삼키고 말았지만. 미코토가 주춤주춤 뒤로 움직이면 얼른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는 듯이 문 너머의 사람이 말한다.
“미사카.”
자신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 사람의
“나야... 카미조 토우마. 문, 열어 줄래?”
다정하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자. 천천히 마셔.”
미코토는 식탁에 앉아 카미조가 건네는 머그컵을 받아 들었다.. 머그컵에 담긴 것 치고는 그렇게 뜨거운 감각은 없었다. 연둣빛 액체에 멀거니 떠오른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자니 투명하게 자신을 바라보았던 하얀 소녀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왜, 왜 지금 내 눈앞에 없는 거야 항상 갑자기 나타나는 주제에, 필요할 때는 나타나지 않아 왜.
울컥, 안에서 꾸역꾸역 올라오는 것들을 삼켜내기 위해 미코토는 카미조가 타다 준 차를 한 모금 마신다. 그가 자신의 방에 찾아온 이유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미코토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건너편에 앉은 사람도 입을 열기 힘든 건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계속 컵만 만지작거리며 밑을 보다가 자신과 시선이 마주치면 애달프게 웃었으니. 자신이 내뱉을 말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상대를 상처 입히기 싫어하는 이기심일까.
“그래서,”
결국 먼저 입을 뗀 건 미코토 쪽이었다. 이젠 힘도 잘 쥐어지지 않는 두 주먹을 꽉 쥐고, 가늘게 떠는 입술을 긴 심호흡으로 진정시키면서, 미코토는 말을 이었다.
“왜, 여기까지 온 건데?”
“미사카...”
“변명하려고 보낸 거 아니야? 왜 자기들이 직접 말 못 하고 널 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해. 들어볼 테니까.”
“... 너무...”
하. 미코토는 표정을 한껏 일그러트리며 코웃음을 쳤다.
“그럼, 걔네들이 한 짓이 그냥 장난이라고 말할 셈이야?”
시라이 쿠로코는 자신을 속였고, 쇼쿠호 미사키는 자신을 조종하려다 실패했다. 여행에 따라온 사텐과 우이하루도 뭘 숨기고 있을지 몰랐다. 무엇보다, 미코토는 그들이 숨기는 것이 자신을 위함이라는 걸 알아차려서 더 화가 났다. 아니면, 그냥 자기가 그렇게 착각하고 싶은 걸까. 어쩌면 내가 그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전제 자체가 잘못된 걸지도 모르지. 카미조는, 자조하는 미코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미사카. 한 글자 한 글자를 입에 담아내는 그의 눈가는 금방이라도 그 소녀의 머리칼처럼 투명한 은빛의 방울들을 쏟아낼 것 같았다. 그럼 한번 지껄여봐. 뭐라도 말해보라고. 미코토는 이를 악문다. 쥐고 있는 머그컵 꽉 손에 쥔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전력으로 컵도 식탁도 이 방도 전부 깨질 것만 같았다.
저 남자와 자신만은, 멀쩡하겠지만.
“미사카.”
조금 메인 목소리에 미코토는 저도 모르게 앞을 응시한다. 아랫입술을 깨물다 다시 말을 여는 남자의 얼굴이 어딘가 몹시도, 처절해 보였다.
“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
미코토는 일순, 토기를 느껴 손으로 자기 입을 막는다. 이제 뱉어낼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녀는 속이 울렁거림을, 반고리관이 뒤집어짐을, 시야에 노이즈가 끼는 것을 느낀다. 남자는 그녀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계속한다. 차갑고 처량한, 목소리로.
“너는 학원도시의 붕괴를 막는 일에 우리들과 함께 나서 주었고,, 그것을 위한 마법식을 결행하던 중에 예상치 못한 사고에 휩쓸려서 사라졌었어. 다시 네가 돌아왔을 때는 7년이 흐른 뒤였고. 너는 보름 정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가 엊그제 일어난 거야.”
미코토는 가쁜 숨을 반복적으로 내뱉는다. 질끈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유일하게 느껴지는 것은 귀에 내려 꽂혀 들어오는, 남자의 목소리. 떨려오는 목소리뿐.
“여기는... 너의, 치료를 위해 온.. 곳이야.그 공간에 있던 탓인지 너는 이곳의 시간이 7년 후의 미래라는 걸 못 받아들이고 있었거든. 최대한 변화된 환경과 떨어진 곳에서 천천히 현실감각을 익히기 위한 재활치료를 하려고 그랬어. 쇼쿠호의 말로는, 너는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 그동안에 있었던 공백을 없애고 있다고 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새에, 무의식적으로.”
뇌 전도율을 조작하여 현실에 가상을 덧씌운다. 그 어떤 현실보다도 더 진실 같은 허상. 일렉트로 마스터 중에서도 정점에 오른, 학원도시의 3위만이 할 수 있는 기만이었다. 결국 자신의 능력이, 자신을 속이고 있었단 뜻인가. 그 와중에도 미코토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 그래서 그렇게 자주 현기증이 일었던 건가. 무의식 중이라고는 하나 자신의 뇌의 생체전기를 계속 조작하고 있는 것은 많은 힘을 소모했을 테니.
“... 그, 수녀는? 너랑 같이 있던 거 아니야?”
그녀는 쭉 알고 싶었던 것을 묻는다. 가장 듣기 두려웠던 질문을, 가장 대답하기 힘들었던 의문을. 얼핏, 자신의 상황과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없어야만 하는 사람의 안부를 묻는다. 시선은 아래에 고정한 채로, 표정을 읽는 것마저 두려워서, 미코토는.
“미사카... 인덱스는...”
인덱스. 그의 입에서 나온 그 수녀의 이름이 왜인지 무척이나 낯설게 들린다. 휘이익. 바람이 한 차례 불어간 것 같았다. 하지만 미코토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들 수 없었다, 가 더 정확한 표현이었겠지만.
“인덱, 스는, 그 날... 7년 전에 학원도시의 붕괴를 막는 결계를 세우는 마법식에 직접 참여했었어. 그, 애의 지식은 많은 도움이 되었.. 거든.나는, 아무, 아무것도.. 할 수 없.. 어서....”
남자의 흐느낌이 문장 중간중간 섞였다. 미코토의 맥박이 빠르게 뛰었다. 어깨는 모으고, 손으로 팔을 감싸 안는다. 휘이잉- 바람이 자꾸만 불어왔다. 미코토는 고개를 돌려 창문을 본다. 역시나, 창문은 열려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찬 기운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녀는 침대 위의 에어컨을 본다.
“마법식이 끝나갈 때, 갑자기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더니, 검은손들이 마술사를 끌고 가려고 했었어. 내가, 내가 거기서 막았더라면, 좀 더 빠르게 달려갔더라면...!”
에어컨은 꺼져 있었다. 하지만 바람은 계속 불어온다. 공기 중에 자신의 심장소리와 식은땀이 흐르는 소리와 가쁜 심호흡을 싣고, 퍼트린다. 미코토는 고개를 돌린다. 눈앞의, 소년의 모습이 지지직거린다. 남자의 목소리로 울부짖던 소년이 일어나 그녀를 바라본다. 그러나 미코토는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다. 심야의 텔레비전처럼, 회백질의 노이즈가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덱스는... 식을 거행하는 마술사와 가까이에 있었어. 그래서 그를 밀쳐내고 대신 끌려간 거야... 미사카, 너는 인덱스의 옆에 서 있었어. 너는 인덱스의 손을 잡고, 끌어당기려고 했던 것 같아. 너무.. 너무 순식간에 벌여진 일이었어. 나는... 나는... 무능해서,너희를 구하지 못하고... 7년...7 동안이나...”
소년은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양 손으로 마구 쥐어뜯었다. 미코토는 남자의 오열에 섞여 위이이잉-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꿈을 기억하는 것처럼, 신기루 같은 공기의 떨림이었다. 소년은 숨을 헐떡이며 자신에게로 걸어왔다. 미코토는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오래된 죄책감과 절망으로 물들여진, 아마 지금의 자신과 무척 닮아 있을 얼굴을.
“미안해. 미안. 미사카.”
그가 자신의 머리에 오른손을 조심스레 올린다. 신의 아들이 그들의 죄를 대신하려는 듯이, 안수기도를 드리는 것 같은, 그런 상냥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쨍그랑. 뒷목 부근에서 고통이 신경을 타고 그녀의 두뇌를 잠식해나간다. 유리컵이 산산조각 부서지듯, 미코토의 세계도 부서진다.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다시 뜨면,
아. 그렇구나.
미코토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본다. 머리 위에 얹어져 있던 그의 손의 크기를 실감한다. 다르구나. 달라진 거였어. 남자는, 소년이었던 카미조 토우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는다. 미안. 미안해. 미코토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머릿속은 이미 깨어져있던 조각들을 맞춤에 여념이 없다. 모든 게 미쳐 있으면, 이상한 점 하나가 정상적으로 보이는 걸지도 몰라. 나지막하게, 그런 감상을 내뱉을 정도로. 미사카 미코토는 미친 걸까? 그게 아니라면
바람이, 미코토의 뺨을 스친다. 그제야 미코토는 그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목이 긴,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형식의, 모든 게 새것인 이곳에서 유난히 낡은, 그 선풍기를.
그게 아니라면,
거기에는,
자신을 둘러싼 이 세상이
하얀 수녀복을 입은 수녀가 가만히
전부 다 돌아버린 걸까.
미코토를 바라보고 있었다.
♠3. 떨어지고, 올라가는 이야기
“단발. 내가 했던 말 기억나?”
“뭐야? 새삼스럽게 이상한 분위기 잡고.”
“이 토끼굴(Rabbit hole)은 위상과 위상의 틈새라서-”
“혹시 나갈 수 있게 되더라도 그게 우리가 살았던 시대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라는. 거지?”
“잘 기억하고 있었네. 응응. 단발 참 장해.”
“너 말이야, 내가 그쪽의 지식을 하나도 모른다고는 하지만 너무 얕보는 거 아니야? 나는-”
“학원도시의 레일건님이라는 거잖아. 네네.”
“이 레퍼토리 지겹지 않아? 그동안 나도 너도 서로의 분야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해서 어느 정도는 알잖아. 그래서,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뭔데?”
“.....”
“뭔데. 설마 또 내 푸딩을 먹었다던가?”
“우으으... 기껏 중요한 얘기를 하려 그러는데 갑자기 푸딩 얘기는 왜 꺼내는 거야? 뭐, 조금 맛은 봤을지도.”
“결국 먹었다는 얘기 구만.. 뭐 됐어. 또 사면되고.”
“.....”
“말해봐. 제대로 들을게.”
“단발은, 만약 이곳을 나올 수 있게 된다면, 두렵지 않겠어?”
“.... 나갈?”
“그건....”
“.... 뭐야!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고 한 걸로 싸운 지는 벌써 오래되었잖아?”
“여긴 시간이 흐르지 않지만 말이야.”
“딴지 걸기는... 말이... 그렇단 얘기지.”
“만약의 얘기야. 우리 여태껏 나가게 된다면 어떨지에 대해서는 아직 한 번도 얘기해본 적 없었을지도.”
“음.... 그랬었나? 뭐, 그래도 난 상관없어.”
“.... 상관, 없다고? 나가면 모두 당신이 처음 보는 사람들, 알 수 없는 세상일지도 모르는데? 당신이 지금껏 알고 있던 사람들을 전부 보지 못하게 되는 건데도?”
“응.”
“... 어째서?”
“뭐, 그야... 네가 있잖아.”
“.....”
“혼자였다면 몰라도... 네가 같이 있으니까.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어, 어쨌든 둘이 같이 있는 거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더 이상 소중한 사람들을 못 보게 되어도?”
“.... 응.”
“거짓말이네.”
“예전 같았으면 거짓말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야.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난 그때 네 손을 잡은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고.”
“.... 토우마라면,그랬을 테니까?”
“아마 그때 우리의 자리가 바뀌었더라도, 넌 내 손을 끌어당겼을 테니까.”
“그걸, 단발이 어떻게 아는데?”
“그냥, 알 수 있어. 지금처럼 너랑 알고 지낸 게 꽤 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어.”
“나는... 당신이 아는 것만큼 그렇게 헌신적인 사람이 아닐 수도...”
“아! 그럼 그런 걸로 해. 내가 너에 대해서 그렇게 착각하고 있다는 걸로.”
“그걸로... 되는 거야?”
“응.”
“아.. 아하하하!”
“뭐... 뭐야?왜 웃는 건데?”
“아니... 그냥. 역시 내가 잘못 본 건 아니겠다 싶어서.”
“무슨 뜻이야 그거?”
“저기, 미코토. 나는 역시 그렇게까지 착한 사람이 아니야.”
“아- 네, 네. 그러셔.”
“나는... 당신에게 숨긴 게 있어.”
“뭐?”
“사실 이 토끼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야.”
“뭐라... 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들어는 봤지? 그것도 사실 마도서거든. 그때 학원도시의 위상을 뒤집어 놓으려는 술식을, 이 마도서의 잠재되어 있던 ‘앨리스의 꿈’으로 막았었어.”
“그건 이미 오래전에 들었어. 그것보다, 앞에 말했던 걸 설명해.”
“모르겠어? 여기는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로 들어오기 위한 출입구, 토끼굴이야. 여기서 현실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이상한 나라의 여행자인 앨리스, 단 한 명뿐이고.”
“.....”
“있잖아- 단발. 나는 이미 나갈 문을 찾아 놓았었어.”
“....”
“그런데, 무서워서... 말하지 못했어.”
“뭐야, 내가 너를 배신이라도 한다는 거야? 아니, 배신을 할 수 있는 입장은 너였잖아? 나 몰래 여기에서 나가버린다면....”
“배신은, 당신이 먼저 했잖아!”
“......”
“토우마가, 보고 싶었던 거지? 그리웠던 거지?”
“나.. 나는...”
“알고 있었어... 나도, 나도 그랬으니까... 당신이 내 뇌의 정보를 바탕으로 여기를 만들었을 때, 그런 감정을 들켰을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우리 둘은 공범일 수도 있는 거야.”
“.......”
“그렇지만- 그러니까 미코토.”
“미.. 미안.. 나는... 나는....”
“미코토. 미안해.”
“뭐...?”
툭. 아주 가벼운 손짓으로 흰 토끼는 앨리스를 밀었습니다. 앨리스는 몸을 휘청거리며 넘어지더니 곧이어 길고, 긴 굴에 빠져 한참 동안을 내려갔지요.
그래도 너라서 다행이었던 것 같아.
구멍에 빠지기 전, 앨리스는 흰 토끼가 그리 중얼거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답니다.
Joker. 그러면 분명히 도착하게 되어있어.
“어째서야”
남자가 나가고, 공백만이 남은 방 안에서 미코토는 그렇게 물었다. 물음을 받은 흰 수녀는 말이 없다. 선풍기가 부는 바람에 그녀의 은발이 휘날려 달빛에 반짝거렸다.
“어째서, 내 눈앞에 나타난 거야?”
미코토는 흰 수녀에게 다가선다. 자신이 만들어냈던, 허상은 이미 카미조 토우마에 의해 깨어졌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흰 수녀는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그녀의 어깨에 대고 꽉, 쥐어 보았다. 흰 수녀는, 미동도 없이 물끄러미 미코토를 바라본다.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차가운 것 같기도 한 얼굴로, 그저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이 날 불러내서-”
“난 부른 적 없어!”
파지직. 스파크가 그녀의 손에서 튀어 올랐다. 덜컥, 겁이 난 미코토는 얼른 수녀에게서 손을 뗀다. 그러나 흰 수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미간을 약간 찌푸릴 뿐. 아팠던 걸까? 미코토는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얀 소녀는 애상을 띤 얼굴로 미소 짓는다. 그녀는 조그만, 자신과 같은 시간대에 멈춰버린 손을 내밀어 그녀의 눈가에 걸린 눈물을 조심스럽게 거둬냈다. 이젠 다시는 성장할 수 없는 손의 따스함이 그녀를 괴롭게 한다. 탁! 미코토는 그 손을 쳐내곤 흰 수녀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다.
“모든 게... 모든 게 가짜였어! 너조차도 내가 만들어낸 가짜였던 거야. 그러니... 그러니까,이젠 사라져. 제발! 내 눈앞에서 좀 꺼지라고!”
미코토는 그렇게 외치며 주저앉았다. 무엇을 믿어야 하지? 흐느끼는 그녀의 어깨에 두 온기가 닿는다. 어떻게, 이 온기까지도 똑같이 재현해 낼 수 있을까. 미코토는 눈앞의 형체가, 자신의 재능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전부 다 거짓이잖아...”
“아니, 아니야.”
“네가, 어떻게 알아. 너도.. 너도 내가... 내가...”
자신의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만들어낸 기억의 단편. 미코토는 그녀가, 그녀를 만들어낸 자신이 이룰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아아- 하지만, 너도, 너도 그래. 어떻게 나만 남겨두고...
“미코토.”
“그, 그 모습으로 내 이름.. 부르지.. 마...”
흰 수녀는 입을 다문다. 미코토는 눈을 감는다. 자신의 뇌 전도율을 무의식적으로 조절하는 거라 그랬지? 그렇다면-
“미코토! 안 돼! 지금처럼 감정이 격화된 상태에선 섬세한 컨트롤이...”
“나한테, 다가, 오지.. 말라.. 고!”
아차. 일어나서 수녀를 밀쳐내던 미코토는 어지럼증에 발을 헛디딘다. 느껴질 충격을 예상하고 눈을 감으면, 포근하게 자신을 감싸 안는 촉감이 느껴진다.
“다행이다... 다친 곳은 없어?”
“놔...”
수녀는 엉거주춤 그녀를 놓아준다. 털썩. 받침대가 없어진 미코토는 힘없이 다시 자리에 주저앉는다.
“.... 그,”
“왜, 왜 사라지지 않는 거야.”
수녀의 말을 끊곤 미코토는 빠르게 말을 잇는다.
“왜,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전부 다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라며? 그걸 그 녀석이 깬 거잖아? 그러면.. 그럼 너도 얼른 사라져야 하는 거 아니야? 왜.. 왜 내 눈앞에 있는 건데... 진짜도...아니면서...”
“.....”
“나.. 난,이젠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내가 만들어낸 허상인지 모르겠어.”
“단발.”
“있잖아, 사실 현실로 돌아간 건 너이고, 나는 여기서 내가 스스로 만든 공간에 모두를 만들어내서는, 네가 날 두고 떠나갔다는 사실을 잊어보려는 거 아닐까?”
미코토는 흰 수녀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묻는다. 커다란 절망을 보곤 오히려 어이가 없어 웃어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웃으며 수녀에게 묻는다. 그녀와 하얀 소녀만 남긴 채 주변의 세상이 조금씩 스러져갔다. 까맣게, 어느 날 둘이 떨어졌던 그 공간처럼. 네가 내 환상에서 나온 것이라면, 얼른 동의해줘. 자- 빨리.
“.... 미사카 미코토는... 그런 사람이야?”
그러나 수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마치 위험한 곳에 자신을 따라가고 싶다고 떼쓰는 아이를 두고 가는 부모처럼, 그 목소리는 낮고, 엄숙하며, 슬픔과 애정이 배어있었다.
“미코토는, 자신의 죄책감을 그런 식으로 합리화하는 사람이야?”
내가 아는 미사카 미코토는- 수녀의 흰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진다. 그게 억지로 울음을 참는 얼굴이라는 것쯤은
“그런 사람이 아니잖아.”
미코토도 알고 있었다.
“그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미코토는 수녀의 팔을 세게 잡는다. 고개를 숙인 채로, 자신의 격한 감정을 목소리에만 드러내며 울부짖는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다들 달라졌고, 너는 없어진 이 세상에서 나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건데....”
목표도, 길도 보이지 않아. 여긴 모든 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항상 곁에 있던 네가 없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쉽게 절망해서 모든 걸 받아들이기 싫다고 떼를 쓰고 말았어.
“네가, 네가 알려줘야지... 나를 여기로 안내한 건 너잖아. 왜 내 곁에서 사라지는 건데!”
“미코토...”
수녀는 양손으로 그녀의 뺨을 살짝 들곤 이마를 맞댄다. 머리칼과 등을 쓰다듬자 미코토는 그녀를 부여잡고 두 눈을 감는다. 어차피 그녀와 자신 빼고는 모든 게 새카만 세상임에도,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않겠다는 듯 눈을 감아버린다.
“미코토,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따라 달렸어.”
“..... 난,나는 어디든 상관이 없어.”
네가 같이 있다면, 네가 없어졌다면. 전제는 달라졌어도 답은 똑같았다. 그녀 자신의 마음만 달라졌을 뿐.
“그럼 아무 데나 가면 되지!”
하얀 소녀는, 미코토의 얼굴을 보며 퍽 유쾌하게 말했다.
“아무.. 데나?”
“그럼, 당신은 분명히 도착하게 되어 있어. 오래 걷게 될 지라도.”
휘이이잉- 그녀가 그렇게 말하자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미코토가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고개를 뒤로 돌리면, 어딘가, 끝이 떨리는 수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억, 나? 우리가 그곳에 떨어졌을 때... 당신이 제일 처음으로 만들었던 것.”
거기에는, 목이 긴, 세 개의 프로펠러가 천천히 돌아가는,
“바람을 일으켜서 전기를 만든다고 미코토가 설명하니까, 내가 그럼 전기로도 바람을 만들 수 있는 거냐고 그랬었잖아.”
아, 그렇구나. 그래서 바람이 불 때마다 네가 보인 거였어.
미코토는, 천천히 그것을 향해 걸어갔다. 어딘가, 세월의 빛을 띤 선풍기는 천천히 돌아가면서 바람을 내고 있었다. 문득, 미코토는 불안해져 뒤를 돌아본다. 하얗게, 아지랑이처럼 사라질 것 같은 소녀가 자신을 보고 미약하게 미소 지었다.
“인덱스...”
“걱정 없을지도. 미코토라면.”
“하지만...”
“괜찮아. 나는 믿는걸.”
미코토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금방이라도, 감정들이 터져 나와 버릴 것만 같았다. 인덱스도, 미코토도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난...”
“그러니까, 미코토도 자신을 믿어줘.”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은 인덱스는, 그 미소만이 선연해서, 미코토도 따라 웃을 수밖엔 없었다. 웃어 보이면 된다고 말한 건, 분명히 너였지? 너였던 거지.
믿는 수밖에. 자신과 인덱스가 함께했던 시간들을.
파직. 선풍기였던 것은 조금만 전력을 갖다 대니 금방 멈추었다. 미코토는,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뜬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깔끔하게 하얀색과 하늘색으로 꾸며진 방도, 새하얀 침대 위 시트와 커튼도, 작은 주방과 냉장고와 에어컨과, 아마 자신이 선풍기로 덧씌워 놓았던 무언가도.
인덱스가 없는 것도.
이게 그대로였던 거다.
미코토는 돌연 바람이 쐬고 싶어 창문을 열었다. 밤바다의 바람이 조금씩 불어와, 젖은 뺨을 식혀주고 있었다. 상냥한 이별이었다.
5. 행복했던 여름날을 기억하고
“그래서, 이제는 그 애의 환영이 아예 안 보인다는 게 맞는 거지요?”
“응.”
“그렇군요.”
쇼쿠호는 미코토의 말에 긍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들어주기만 하는 게 그녀의 일이었으니까. 편안한 분위기의 상담실에서 미코토는 약간 머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본다.
“약도 잘 먹고 있고... 이제는, 괜찮아진 것 같아.”
“그래도 정해진 기간까지는 상담치료에 나오셔야 해요.”
“알았다니깐. 나 참, 왜 네가 내 담당인 건데?? 이거 상담 윤리원칙 같은 거에 어긋나는 거 아니야?”
“어머나- 저는 지금 최고로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미사카상을 보고 있답니다. 그리고 여긴 제가 원장인걸요오?”
“역시 이 병원 금방 망할 것 같아.”
“흐음...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 역시 다른 분으로 바꿔 드릴까요?”
쇼쿠호가 살짝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음, 아직도 그때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걸까. 폭주할지도 모르는 자신을 막기 위해서 내린 조치라고는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기억의 일부를 읽어 버린 것에 대해 쇼쿠호는 아직도 신경 쓰고 있던 것 같았다.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이렇게 미안한 기색을 보이면 이쪽도 마음이 불편해지고 만다.
“됐어. 다른 사람한테 일일이 설명할 것도 아니고... 복잡해지잖아. 사정을 알고 있는 네가 나은 것 같아.”
“미사카상...”
“뭐.. 나도 딱히 네가 좋다는 건 아니지만, 최선이 아니면 차악이라는 거지...”
“흐-음?”
“뭐.. 뭐야?왜 그렇게 보는 건데?”
“아무것도요오-? 후훗, 오늘은 시간이 다 됐으니 이만 가셔도 되겠네요.”
쇼쿠호는 뚱한 표정의 미코토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손 흔들어 배웅했다.
미코토가 상담실을 나오고 로비로 나오자 자신을 기다렸던 쿠로코가 보였다. 자신보다 키가 조금 높아진, 적갈색의 머리를 빨간 리본으로 묶은, 여전히 자신을 ‘언니’라 부르는 20대의 여인이 자신을 웃으며 맞이한다.
“기다릴 필요 없다니깐. 바쁜 거 아니었어?”
“괜찮답니다. 안티스킬 쪽은 오늘 휴가를 내었어요. 오늘 하루는 온전히 언니에게 쏟을 것이랍니다. 우후훗!”
“... 뭔가.”
“오호호호! 그럼, 이젠 어디로 가실 건가요? 오랜만에 언니랑 데이트라니! 아 쿠로코는 벌써부터 심장이 떨려서 어찌할 바를...”
“도서관에 갈 거야.”
“그렇군요, 도서관에.. 에엑?!도서관이면 언니랑 이런~짓, 저런~짓 못하지...”
“나 간다~”
“자, 잠깐만요 언니~ 쿠로코도 같이 가요!”
병원 건물을 나서자, 미코토의 머리 위로 초가을의 햇살이 내려앉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뉴스거리를 실은 비행선이 유유히 떠있었다. 햇살이 강한 것치곤,, 공기는 선선했기에 계절이 가을로 들어섰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미코토가 눈부심을 가시기 위해 손으로 하늘을 가려보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온다. 멀리, 풍력 발전기가 바람개비처럼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시원하네...”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미코토는 살며시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