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법 (전자목록) [어마금]

가정법

 

-BY. 선풍기(coka0708)

 

 

 

-전자 목록 (인덱스×미코토)

-보는 관점에 따라 카미코토,, 카미인덱 요소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이건 인덱미코인덱 백합입니다. 믿어줘.

-캐붕 상당합니다.

-원작과는 관계없는 2차 창작물입니다. 
-흑백합의 꽃말은
[사랑] [저주]

 

 

1.

가령, 혹시, 만약에...

대게 이런 말로 시작되는 것들은 괜히 쓸데없는 상상만 가중시켜 현실에서 눈을 돌리게 만든다. 하지만, 그게 뭐가 어때서? 누구나 색다른 판타지(환상)를(환상) 꿈꿀 자유는 있다. 망상만으로 끝난다면야, 죄가 되진 않는다.

그 정도의 자유도 없다면 이 팍팍한 학원도시라는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가겠는가. 게다가, 퍼스널 리얼리티를 키우는 데엔 자신만의 상상력을 키우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라는 논문도 어디선가 읽었단 말이지...’

 

여기, 교복을 입고 있는 갈색의 단발머리 소녀도 마찬가지. 그녀가 레벨 5의 레일건이든 명문 토키와다이의 에이스든 간에 그녀도 사람인지라 자유롭게 망상할 자유는 있었다.

 

‘그.. 그냥...’

 

물론 그 '미사카 미코토'가 어느 삐쭉 머리 남학생이 다니는 고등학교 근처를 기웃거리며 어떤 망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 사람이 수두룩하겠지만, (가령, 곱슬 거리는 긴 웨이브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소녀라던가.) 어쨌든 죄는 아니었으니.

게다가 미코토가 상상하고 있던 내용도 사실 그렇게 특별하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만일 자신과 그가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된다면 어떨까?' 하고 가정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등교 길에 우연히 만나거나, 도시락을 싸와선 같이 점심시간을 보내고 끝나고 같이 하교를 한다던 가의...

 

! 파지직!

 

그런, 그 나이 때의 소녀가 상상할 법한 아주 사소한 순간들이 죄가 될 리는 없었지만... 이 말은 철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방금 그녀가 빨개진 얼굴로 친 벽에 순간적으로 높은 전압이 닿아 검게 타버렸으니... 딴 건 몰라도 기물파손의 죄는 들어갈 것이다.

 

, 무무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소..소.. 손이라던가 그런 거 자연스럽게 잡을 수 있다던가 그런...’

 

? 왜 안 된다고 말하는 걸까나? 이런 대우 매우 불합리할지도.”

 

그러니까, 학생증을 보여주면 된다니까?”

 

뒤돌아선 양 손으로 뺨을 감싸고 진정하고 있던 미코토의 귀에 익숙하지 않을 수 없는 말투가 정문 앞의 언쟁에 섞여 들어왔다.

 

나는 이 학교의 학생이야. , 이렇게... 토우마네 학생들과 같은 옷을 입고 있잖아?”

 

그니까... 이 옷 대충 보면 우리 학교 교복 같지만, 여기 문양 마크도 없고! 어디의 코스프레 샵에서 갖고 온 옷 같은데?”

 

“... 효우카랑 같이 갔던 곳에 걸려있던 옷인데... 벌써... 들켰을지도...”

 

! 방금 들켰다라고 말했지? 역시 이거 코스프레 옷이지?”

 

“아.. 아니야!! 토우마랑 같은 학교에 다닌다고...”

 

긴 은발에 새봄의 녹음처럼 편안한 초록색의 눈동자. 역시, 그 녀석 옆에 딱 붙어있던 그 수녀였다.

 

쟤는 왜 여기 있는 거야?!’

 

눈을 살짝 가늘게 뜨던 미코토는 일단 벽에 달라붙어 상황을 보기로 했다. 까만색의 세일러 교복을 입은 그녀는 평소의 하얀 수녀복과는 인상이 달라 보였다..

뭐랄까, 평소엔 수녀 복을 입고 있었음에도 빈말로도 성스럽게 보인다고는 못했는데 지금은 어딘가의 명문 학교의 아가씨처럼 보인 달까? 하얀 피부와 햇빛에 반짝이는 은발이 까만 세라 복에 대비되어 마치 까만 백합에 이슬이 맺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으으으...? 이제 배가 너무 고파서 쓰러질 것 같아...”

 

하긴 저게 더 저 녀석 답네. 미코토는 자신도 모르게 입 꼬리가 슬 올라가는 걸 느꼈다.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일단 학생증이 없으면 이름이라도 말해봐. 검색해보면 뜨겠지. 우리 학교 학생이라는 게 확실해지면 안으로 들여보내 줄게.”.”

 

“그.. 그건... 조금... 곤란할지도”

 

슬쩍 시선을 피하며 뒷걸음질 치는 소녀를 보자 학생회의 두 명의 눈빛의 의심이 더해졌다.

 

이름도 말 못하는 거야?”

 

이거 저지멘트에 연락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나..나는 그냥 안에서 토우마를 찾아서 밥을 줬으면 하는 거야...! 우으으.. 역시 사람이 없을 때 몰래 들어왔어야 했는데...”

 

보아하니 몰래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다 교문 앞에서 학생회한테 걸린 모양이었다. 입고 있는 옷도 학교의 교복과 비슷했기에 미코토가 다니는 토키와다이 같은 명문이면 모를까, 평범한 7학구의 고등학교라면 그냥 모르고 들여보내 줄 법도 했다. 그러나 마침 요즘은 학생들이 방과 후에 서로 다른 학교에 숨어 들어서 골칫거리가 된 참이었다.

평범한 학생들이면 몰라도 여기의 학생들은 학원도시의 학생들이다. 학생들끼리의 분쟁이 학교끼리의 분쟁이 되면 일이 복잡해지는 수준이 아니게 된다. 저지멘트는 이미 다른 일로도 벅찼다. 그러니 각 학교의 학생회들이 자율적으로 경비를 서는 것이다.

 

저 녀석은 운 나쁘게 걸린 거고.’

 

하기야 평소의 수녀 차림이라면 저런 논쟁 없이 바로 교무실행이다.

 

뭔가 그 녀석이 필사적으로 막아냈으니까... 확실한 신원도 없는 거겠지...’

 

미코토는 언젠가 저 하얀 소녀를 마주쳤을 때를 떠올렸다. 왜인지는 몰라도 언제나 난리통이 었지. 항상 옆에는 그 검은 소년이 붙어 있고. 쿠로코가 저지멘트로서 소녀의 신원을 알아보려 할 때마다 소녀의 앞을 막아서며 짓던 어색한 미소. 마치 짐승의 어미들이 필사적으로 새끼를 지키려는 몸짓.

 

일단 따라와 줘야겠어

 

“에.. 에엣? 자, 잠깐! 이.. 이거 놔줬으면... 할지도..”

 

그것을 볼 때마다 묘한 뒤틀림이 가슴에 얹혀졌었는데.

 

잠깐!”

 

희고 작은 손을 잡아끄는 손 위에 턱, 하고 다른 손이 얹어졌다.

 

, 여기 있었구나! 얼.. 얼마나 찾았.. 다구?”

 

딱딱한 웃음을 하얀 소녀에게 지어 보이며 미코토가 말하자 학생회의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교복은... 토키와다이의?”

 

이 학생과 아는 사람입니까?”

 

“아... 네, 뭐, 그렇죠?”

 

슬쩍 옆의 소녀에게 눈빛을 보내자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뾰루퉁한 표정이 비쳤다.

 

얘는 도와주려고 하는데도 왜 이런 표정이야?’

 

정적이 흐르자 학생회의 얼굴빛이 점점 의심스러워진다. , 진짜. 좀 눈치채고 따라와라!

 

... ! !”

 

?”

 

먹는 얘기가 나오자 소녀의 녹안이 금세 커지며 반짝거렸다. 단순한 녀석...

 

, 그래! 같이 밥 먹기로 했잖아! 그래서 네가 여기서 날 기다린 거고... , 그렇지?”

 

! 그렇네! , 이 단발을 기다리고 있었어.”

 

그래, 그래. 그러니까...”

 

이만 보내달라는 뜻으로 미코토가 학생회의 둘을 보자 두 사람은 미심쩍어하면서도 둘을 놓아주었다. 그렇게 둘이 엉거주춤 손을 잡곤 학교를 벗어나 근처의 공원으로 나오자 미코토가 손 안의 나비를 놓아주듯 조심스레 손을 놓았다.

한시름 놨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던 그녀는 곧바로 눈썹을 약간 찌푸리더니 양 손을 허리에 얹곤 검은 세일러복을 입은 소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요즘 여기저기서 얼마나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좀 더 생각하고 다닐 수 없어?”

 

생각해서 이렇게 교복이라는 것을 입고 갔는데 거부당했잖아.”

 

아니, 그건 진짜 교복도 아니잖아? 네가 잘못되면 분명 그 녀석도...”

 

토우마라면 괜찮아. 어차피 어제부터 어딘가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까.”

 

? 어디로? ?”

 

미코토는 그 말을 하자마자 흠칫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괜한 질문이었다. 분명 소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질문.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소녀의 시선이 힘없이 땅바닥을 향했다.

 

어딘지는... 몰라.”

 

그리곤 소녀가 고개를 돌려 쓴웃음을 지었다. 익숙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왜인지는... 예상할 수 있을지도.”

 

분명, 다른 사람을 도우러 가겠지. 곤란한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카미조 토우마라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고 소녀는 그를 찾으러 나선 거다. 텅 빈 방에서 멍하니 하늘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색으로 물드는 걸 보다가 문득, 견딜 수 없어져서 나온 거다. 기다리기만 하는 건 싫으니까. 그리고 미사카 미코토는, 소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마 그 누구보다도, .

 

“꼬르르르르륵”

 

기묘한 침묵을 깨트리기라도 한 듯 소녀의 배에서 괴랄한 소리가 났다. , 푸하하하! 뒤이어 미코토의 웃음소리가 노을이 지는 공원의 하늘에 울려 퍼지자 입술을 삐죽이 내민 소녀가 뺨을 붉히며 흥, 하며 몸을 돌렸다.

 

됐고, 단발! 밥 사줘.”

 

? 왜 갑자기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

 

밥 사준다고 했잖아. 약속 안 지킬 거야?”

 

아니, 그건 그때 널...”

 

~ 배고파~ 배고파서 이제 죽어버릴지도...”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며 우는 소리를 하는 소녀를 보곤 미코토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먹보.”

 

소녀는 멀뚱히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조금 고개를 올리니 시원스레 미소를 짓고 있는 미코토의 얼굴 뒤로 점점 쪽빛으로 변하는 하늘이 보였다. 눈... 부실 지도. 인덱스는 멍하니 생각하다 내밀어진 손을 단단히 쥐며 일어났다.

 

둘은 근처의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서로 별다른 말은 없이, 미코토가 앞장서고 인덱스가 뒤를 따르는 느낌으로. 가끔씩 미코토가 잘 따라오고 있나 뒤를 돌면 입을 꾹 다물고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의 소녀가 있을 뿐이었다.

 

2.

함박 스테이크랑, 까르보나라랑, 카레라이스랑, 페페로니 피자랑, 새우 볶음밥이랑...”

 

거기서 더 시킬 거야?”

 

인덱스가 거의 전 메뉴를 읊듯이 하는 걸 가만히 듣던 미코토가 참다못해 한마디 하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 오므라이스랑 돈가스랑 치킨 리소토! 아, 오렌지 주스도 부탁하고 싶을지도!”

 

직원이 허둥대며 메뉴를 적는 걸 보던 미코토는 한숨을 쉬며 메뉴판을 보다 멜론 파르페를 하나 시켰다. 곧 있다 직원이 쟁반 가득 음식을 싣고 오자 인덱스가 눈을 심히 반짝이며 양 손에 숟가락과 포크를 집어 들곤 전투태세로 돌입했다.

 

전부 먹어도 되는 거지?”

 

자신의 앞에 초콜릿 시럽과 멜론 아이스크림으로 게고타 모양을 꾸민 파르페가 놓이자 요상하게 웃던 미코토가 화들짝 놀라선 고개를 끄덕였다.

 

,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 양을 다 먹을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와아! 고마워, 단발! 의외로 상냥하네.”

 

됐어. 너한테 감사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해.”

 

별거 아니라는 듯 디저트 스푼으로 파르페를 먹으려다 미코토는 떨떠름하게 다시 스푼을 내려놓았다. 와구와구 눈앞의 음식들을 말 그대로 없애나가던 인덱스를 슬쩍 곁눈질로 보던 그녀는 조심스레 핸드폰을 꺼내 눈앞의 멜론 파르페를 향해(맨 위에 올린 게고타 아이스크림을 중심으로) 초점을 맞추곤 찰칵! 셔터 버튼을 눌렀다.

 

뭐 하는 거야?”

 

“흐이이익!”

 

됐다!라고 생각한 순간 툭 내뱉어진 목소리에 미코토는 깜짝 놀라 그만 핸드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너..너...”

 

뭘 하고 있는 거냐고 물었어.”

 

입가에 소스를 묻힌 채, 식탁 위에 있는 음식의 반을 없앤 하얀 소녀의 녹안엔 순수한 궁금증이 찰랑거렸다. 처음 보는 소녀의 얼굴에 미코토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이내 다급히 변명을 내뱉기 시작했다.

 

, , 그냥 사진 좀 찍은 것뿐인데? 뭔가 요즘은 다들 먹기 전에 사진을 찍고 나서 먹으니까 나, 나도 가끔은 유행을 따라볼까~ 하고...”

 

사진...?”

 

고개를 갸웃거리는 인덱스의 반응에 되려 놀란 듯 미코토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혹시 사진을 모르는 건... 아니지?”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대체 어떻게 살면 사진도 모를 수가 있지? 수녀가 아무리 세속과 떨어져 산다지만...

미코토는 잠시 망설이다 답을 바라듯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 녹빛의 눈동자에 못 이겨 주머니에서 초록색의 개구리 모양 핸드폰을 꺼냈다. 아무래도 초록색은 약하다. 별로 그게 오리지널 게고타의 색이라서 그런 건 아니지만.

 

, 이 핸드폰에 있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거야.”

 

카메라? 핸드폰?”

 

여전히 소녀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미코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인덱스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카메라를 비춰 화면에 자신과 그녀의 모습을 비춰 보이며 말했다.

 

봐봐, 이렇게 카메라로 대상을 잡고...”

 

화면에 비친 인덱스의 두 눈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찼다. 입이 점점 벌어지다가 이윽고 해사하게 웃는 모습이 화면에 비치자 미코토가 입술을 살짝 짓이기며 옆을 힐끔거리다 눈을 깜빡여 다시 핸드폰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렇게...”

 

찰칵.

셔터음이 울리며 화면이 순간 반짝였다. 놀란 표정의 인덱스와 어딘가 미묘한 무표정의 미코토가 그대로 멈춘 듯 화면에 남았다.

 

. 이게 바로 사진이야.”

 

인덱스가 핸드폰으로 양 손을 뻗자 미코토가 별수 없다는 듯 그녀에게 핸드폰을 넘겨주었다. 요리조리 핸드폰과 자신이 찍힌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던 인덱스가 표표히 미소를 띠우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과학은 이런 것도 할 수 있는 거네...”

 

?”

 

마치 시간은 잘라 낸 것 같아. 이런 거... 분명...”

 

인덱스는 뒷말은 하지 않고 그대로 미코토에 핸드폰을 돌려주고는 다시 음식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미코토도 다시 맞은편으로 되돌아와 녹아가는 파르페를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뭐야... 도대체

 

파르페는 달고 맛있는데도 이상하게 미코토는 자꾸만 어딘가 뒷맛이 썼다.

 

... 그런 쓸쓸한 표정을 짓는 건데?’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상황도 자신의 기분도.

 

3.

사진... 인가.

좋겠네. 혹시, 만약에라도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이 그렇게 사진을 찍어 뒀다면, 그래서 예전의 자신이 맺었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 추억할 수 있다면...

추억이라곤 했지만 정확히 추억하진 못할 것이다. 추억을 할 수 있다 해도, 그건 자신이 아닌 예전의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겠지. 예를 들면 누구일까. 자꾸 끈덕지게 자신에게 말을 거는 빨간 머리의 신부일까. 아니면 가끔 슬픈 눈으로 자신을 보는 동양의 프리스티스일지도.

사실 확신은 없다. 왜냐면 자신에겐 기억이 없으니까. 그건 앞으로도 영원히 찾을 수 없을 테니까. 자신이 그 소년에게 구원받았다한들, 그건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신은 이미 구원받았으니, 더 이상은 바라면 안 되는데. 그래도 이렇게 새로운 걸 알아가고, 자신만의 도서관에 기록할 때마다 더 바라게 되고 만다.

지금의 관계를 소중히 하고 싶어. 더 이상 하나도 잊고 싶지 않아. 시간을 잘라내듯, 이 순간의 감정도 잘라서 보관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옛날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몰랐을 추억을 간직하는 방법을 과학은 이리도 쉽게 발명해 버린다. 그러면 수녀로선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생각까지 들어버린다.

 

아아, 나도 여기에 속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인덱스는 물티슈로 입가를 닦으며 만족스레 빵빵해진 배를 쓰다듬었다.

 

~ 행복해... 이렇게 배부르게 먹어본 적 오랜만일지도!”

 

그 녀석은 매일 이 정도의 식비를 내고 있는 거야?”

 

거의 자신의 팔 길이만큼 되는 계산서를 펼쳐보던 미코토는 어딘가에 있을 삐죽 머리의 재정상태를 위해 잠시 기도했다.

 

단발, 나 한 가지 부탁이 있을지도.”

 

설마 여기서 더 먹을 셈이야?!”

 

뜨악하며 자신을 보는 미코토를 보자 인덱스가 쿡쿡 웃었다.

 

단발이 그러고 싶다면 그래도 좋은데?”

네 뱃속엔 뭐가 든 거야?”

당연히 신의 말씀이지. 우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말씀이 곧 빵이 되고 살이 되는 거니까.”

 

지금은 패밀리 레스토랑의 전 메뉴가 들어있겠네.”

 

그녀의 말은 못 들은 척하며 인덱스가 쪽 빨대로 오렌지 주스를 빨았다. . 작게 콧방귀를 뀌며 미코토도 한 손으로 턱을 괴며 창밖을 보았다.

 

별로, 나도 이런 거 너에게 부탁하고 싶진 않아. 인덱스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속으로 말을 골랐다. 하지만 역시 네가 제격이니까. 아니, 사실 너밖에 없으니까.

 

쪼로로록. 주스가 다 떨어져 공기가 빨대로 흡입되는 소리가 들리자 미코토가 힐끗 소녀를 보았다. 뭐라도 말해보라는 듯이, 그다지 네 부탁은 궁금하지 않다는 듯이. 컵을 내려놓은 인덱스가 살며시 자신이 입은 세일러복의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저기, 단발. 혹시 말이야...”

 

결정은 조금 충동적으로 했을지 몰라도 고민은 쭉 해오던 일이었다. 엉망진창으로 다쳐온 소년을 볼 때마다, 어딘가에서 굴러왔다고 둘러대는 어색한 웃음을 볼 때마다, 밤마다 남몰래 자는 줄 아는 자신의 머리맡에서 작게 미안, 미안해 인덱스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쭉 생각해오던 일이었다. 모든 게 자신이 벌인 일 같아서. 아니지. 이건 거짓말이다.

자신이 끌어들인 것이다. 자신이, 소년의 평화로운 일상을 깨트리고 말았다.

 

혹시 토우마가 나를 찾으러 가야 한다고 어디론가 떠나려고 한다면,”

 

아마 소년은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위험에 처하면 구할 것이다. 그건 그냥 소년의 특성이다. 아마 그때의 상대가 자신이 아녔더라도 구했을 것이다. 소년은 마치 구원이 자신의 의무라는 듯 행동하고 다녔다. 그 고귀한 정신 말고는, 모든 게 다 평범한데도.

 

그러니까 마지막 순간에는 안 돼.

 

만일 그가 자신을 구하다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된다면...

 

그땐, 네가 토우마를 막는 거야. 단발.”

 

그러면 나 말고 다른 누군가도 울게 될 테니까.

 

알았지?”

 

그리고 넌 가장 울고 싶을 텐데도 일부러 참는 사람이겠지. 너에게 빚을 지기는 싫어. 그러니 네가 해야 해.

 

부탁이야...”

 

흐려져선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미소를 지은 소녀는 눈을 감고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간절히 기도하듯이.

 

4.

뭘 부탁하나 했더니...

기가 너무 차서 헛웃음도 안 나오는 상황이 이런 거구나. 미코토는 마음속에서 화르륵 솟구쳐 나오는 감정을 억누르려 눈을 감았다. 이 녀석은, 날 뭐로 보는 거지? 파르륵 입술이 떨리는 것 같았다. 자칫 잘못하면 바로 스파크가 튀어나올 것 같다.

 

고개 들어

 

자신도 놀랄 만큼 차가운 목소리였다.

 

“.... 싫어. 내 부탁에 이라고 말해주기 전까진 안 일어나.”

 

아 그래? 난 절대 그럴 일 없으니까 계속 그러고 있던가.”

 

! 미코토가 양 손으로 식탁을 치며 벌떡 일어나자 빈 유리잔들이 달그락거렸다. 그대로 그녀가 자리에서 벗어나자 표정을 굳히던 인덱스가 조용히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랐다. 빠르게 걷는 미코토의 걸음을 따라잡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걷는 인덱스. 그런 둘을 학원도시의 야경이 고요히 비추고 있었다. 자체적인 풍력발전을 통해 전기를 생산하는 학원도시는 ‘도시’ 치고는 공기가 맑아 밤하늘의 별들과 달도 투명하게 빛났다. 그것은 밤늦게까지 학구열로 빛나는 여러 연구기관과 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의 전등 빛과 어울려 학원도시의 야경을 그야말로 절경으로 불릴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주변의 건물이 드문 예의 그 공원에 도착하자, 건물의 빛보단 밤하늘의 자그마한 빛들이 더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미코토는, 거기서 멈춰 섰다. 따라서 인덱스도 걸음을 멈췄다.

마치 둘의 간격만큼의 고요함이 흘렀다. 딱 몇 걸음이면 따라잡을 듯하지만, 이 이상 가까워지진 않는 거리.

 

너 말이야,”

 

가장 깊은 곳에서 감정을 끌어올려선 미코토는 으르렁거렸다.

 

진심으로, 내가 그 녀석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 가능성은, 제일 높다고 생각할지도

 

초봄의 밤바람처럼 조금은 쌀쌀하고 목련의 향이 담긴 듯 담담한, 백색의 목소리.

 

너 그 녀석 능력 몰라?”

 

“능력 하고는 상관없어. 단발도 알고 있잖아.”

 

아니라면, 뭔데?”

 

미코토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파직, 약하게 그녀의 발밑에서 전격이 올랐다.

 

알고 있잖아, 라니. 뭘 말하는 거야. 모르겠다고.

자신이 말리면 그 녀석이 여기 머무를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런 부탁을 자신이 들어줄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거야?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저 하얀 소녀가 자신이 사라진 다는 걸 전제로 그런 말을 했다는 거다.

모든 걸 포기한 것 같은 그런 눈빛. 자신은 그런 눈빛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걸

 

이를 악다물던 미코토가 홱 뒤돌아 성큼성큼 인덱스한테 걸어갔다. 굳은 눈동자로 그녈 응시하던 창백하리만큼 흰 얼굴이 가볍게 들쳐 올려진다. 소녀의 멱살을 들켜 쥔 미코토의 눈매가 매섭다. 왜 그렇게 화내는 거야? 소녀는 이유를 알고 싶지만 물을 순 없었다.

 

... 들어.”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아주 부드러운 것을 닮은, 잘 구운 빵의 표면을 닮은 눈동자. 그 다정한 색깔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말하고 있었다.

 

, 네 그 웃기지도 않는 부탁은 들어주지 않을 거야.”

 

분노라고 생각했던 빛이 조금씩 다른 감정으로 물들여갔다.

 

이해할 수 없어...’

 

서서히 손의 힘을 빼며 미코토는 그녀의 멱살을 내려놓았다. 대신 자신의 이마를 그녀 어깨에 대곤 조금 가빠진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잘... 기억해. 네가, 사라지고... 그 녀석이 너를 찾으러 간다면...”

 

인덱스는 자신도 모른 채 손을 들어 미코토의 등을 쓰다듬었다. 아주 섬세하게 깎은 유리 공예를 만지듯, 닿는 것조차 송구스럽게.

 

나는, 너를 찾으러 그 녀석을 따라갈 거야.”

 

“.......”

 

그러곤 꼭 너를 찾아내서, 그 녀석이 고생한 만큼 전격을 날려줄 거라고.”

 

.”

 

그러니까, 어딘가로 사라지거나 하지 마.”

 

“.......”

 

천천히 자신의 등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멈추자 미코토가 떨리는 손으로 소녀의 검은 옷깃을 움켜잡았다.

 

그 미소는, 자기 자신을 어딘가로 멀리 보내는 그런 표정은, 탁하게 지워지지 않는 저주처럼 자신을 옭아매서,

 

부탁이야...”

 

숨이 막히는 것만 같다. 깊은 심해에 갇힌 것처럼 도움을 구할 외침조차 외칠 수 없다.

 

. 알았어.”

 

그 심해가 자신의 눈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알았어. 미코토.”

 

그러니 이제 울지 마. 그렇게 속으로 다 울음을 삼키지 마.

 

5.

밤바람이 뺨을 스쳐가니 조금은 열이 식혀지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감정적이었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역시 부끄럽다. 후회되지는 않지만.

 

그보다 너, 내 이름 알고 있었냐?”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 전에 미코토는 얼른 대화거리를 찾아냈다.

 

별로. 우연히 알게 되어서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고.”

 

아니... 그래도, 우리 사이가 그, .. 이름을 부를 정도로... 친했.. 던.. 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인덱스의 반응에 미코토는 제 이마를 쳤다. 맞아. 얘 외국인이지.

 

아니, 넌 모를지도 모르지만 일본에서는 서로 친하지 않으면 그... 이름을 마구 부르진 않거든?”

 

뭐야.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단발도 내 이름 부르면 되잖아. 그럼 똑같지?”

 

, ? 왜 그렇게 얘기가 되는데?”

 

내가 미코토의 이름을 부르는 게 불만이라며? 그럼 미코토도 내 이름을 부르면 되는 거 아니야?”

 

아니, 내 말은 뭐로 들은 거야 그러니까...”

장난스레 올라간 입 꼬리와 요살스런 눈웃음. 미코토는 말문이 막혔다. 설마, 다 알고서 그러는 거야?

 

부르기 싫으면 안 그래도 돼~ 미. 코. 토.”

 

“너.. 너...”

 

그럼! 오늘 저녁밥 고마웠어! 미코토~”

 

가볍게 손을 흔들며 총총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인덱스를 미코토는 슬 올려다봤다. 달빛으로 빛나는 은발과 그림자처럼 흔들리는 검은 치맛자락. 멀어지는 걸까. 그래도 오늘은 뭔가 즐거웠는데. 저 옷 때문인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어.

뭔가 다급한 마음이 들어 미코토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입가로 가져다 댔다.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건, 분명 조금 긴장되는 탓이야.

아니, 근데 내가 왜 긴장을 하지?

 

“자.. 잘 가던가... 인덱스...”

 

이 정도면 꽤 멀어졌으니 들리진 않았겠지. 하지만 뭔가, 아쉬운 기분도 드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미코토가 고개를 들자,

 

“너.. 너.. 너..!”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는 인덱스와 눈이 마주쳤다.

 

, 너 왜 아직 안 가고”

 

방금, 내 이름 불렀지?”

 

미코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인덱스가 어딘가 흐뭇하게 웃어 보였다.

 

, 미코토가 원한다면 그런 걸로 쳐 줄게.”

 

“하.. 하아? 내, 내가 언제 그런 걸 원했다고...”

 

그럼 나도 다시 돌아가야지. 나중에 또 봐! ~.”

 

키득거리며 참새처럼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는 인덱스의 뒷모습을 미코토의 얼빠진 표정이 배웅했다.

 

하아...”

 

깊은 한숨을 쉬던 미코토는 문득 시선을 하늘 위로 향했다. 진한 남색 바탕에 은모래를 뿌려 놓은 것만 같은 밤하늘이 보였다.

 

만약, 너랑 내가 여기 학원도시도, 네가 있던 그 교회도 아닌 완전히 다른 곳에서 지금의 신분이 아닌 채 만났더라면.

그랬다면 어땠을까. 혹시 우리가...

 

생각해봤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있을 리 없는 현실을 가정해 봤자 남는 것도, 새로 생기는 것도 없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필요 없는 일이기도 하고.’

 

가정 같은 거 없어도, 지금 여기서의 우리들은...

 

뒷얘기는 좀 더 나중에 하기로 해. 어떻게 될지는 너도, 나도 모르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