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쟁이 찾기(드라히메) [꿈왕국]
-선풍기(coka0708)의 꿈왕국 2차 창작 글연성으로써 원작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집착, 감금, 약물사용 등의 얀데레 소재가 사용되었습니다.
-강압적 접촉, 자살암시 등의 트리거 소재가 있습니다.
-통상 드라이 달각 엔딩 이후가 전제입니다. 엔딩 스포가 다수 있습니다.
-히메(공주)를 하나의 개성이 있는 캐릭터로 보고 있으며 이름은 일판 공식 트위터 계정에서 나온 ‘유메’로 설정하였습니다.
거짓말쟁이 찾기
- BY. 선풍기(coka0708)
Loding....
처음 눈을 뜨고 본 건 탁한, 겨울눈 밑에 숨겨진 마른 잔디와 같은 색의 눈동자였습니다.
“꽤 잤네. 조금 조정이 부족했으려나? 다음엔 0.04% 정도 줄여야겠어.”
쿡쿡 웃는 그가 조심스레 제 뺨을 어루만질 때, 이젠 그럴 힘도 없을 거로 생각했던 몸이 흠칫 떨려왔습니다.
저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 걸까요.
“모르판에서 공수해 온 만큼 효과는 확실하네. 하지만 너무 내 마음대로 컨트롤되는 것도 재미없단 말이지. 안 그래? 너도 즐길 수 없지?”
깊고 흐려서 속을 알 수 없는 두 눈에는 오로지 저만이 비치고 있습니다. 아, 저 표정. 저는 무서워하는 걸까요? 무엇을?
“그.. 저..”
쭉 생각해온 말을 입술 사이로 내미는 것은 역시 많이 긴장되었습니다. 말이란, 쏟아내면 더 이상 주워 담을 수 없기에.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여기서 용기를 내지 않으면 저는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게 되니까요.
“죄송합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1. The game has already started.
“그래서, 너는 지금 자신에 대한 것도, 나에 대한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가?”
“네...”
무채색의 표정으로 드라이는 유메를 바라보았다. 한쪽 다리를 접어 팔로 끌어안듯이 앉아, 무릎에 턱을 기대곤 가만히. 그녀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몇 초간 그와 눈을 마주치며 입술을 우물거렸으나 달빛에 라벤더 빛깔로 반짝이던 시선은 이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드라이는 그저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천천히 숨을 모아 토하며 덮고 있던 이불을 양손으로 슬며시 움켜쥐곤 다시 자신을 훑는 시선엔 초조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아, 그렇구나.
크흑. 그는 참지 못하고 결국 작게 즐거움을 흘렸다. 손으로 입가를 막아도 새어 나오던 웃음소리에 그의 상체가 약하게 흔들렸다가, 갑자기 퓨즈가 끊어지듯 뚝 끊겼다. 좋아. 아주 즐거워 유메. 혼란스러운 눈으로 달빛에 비쳐 웅성거리는 그림자를 바라보던 유메의 귓가에 드라이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게임 스타트다.”
훅 귓가에 속살거리는 낮은 목소리에 그녀는 이불을 움켜쥐었던 손의 힘을 풀었다.
2. Who is a liar?
낮임에도 두꺼운 커튼을 친 방은 어둑했다. 유메는 자신의 시간 감각이 망가져 있음을 느꼈다. 걷기엔 무겁지 않았으나 무슨 짓을 해도 끊어지지 않는 족쇄가 쇠사슬로 침대 기둥에 연결되어있어 침대에서 나와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이 방이 유일했다. 자신은 이런 곳에서 살아왔던 걸까.
여기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창백한 인상의 ‘그’가 유일했다. 그는 언제나 이 방에서 자신을 지켜보았다. 유메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그가 갖다 주는 것에만 의지했다. 그가 먹여주는 음식을 먹고 잠들어 일어나면 항상 방은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아예 새까만 밤이거나, 아니면 이번처럼 커튼을 쳐 놓아 바깥과 차단된 어둑한 낮이거나. 그는 이 방의 안을 누군가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그가 문을 열고 누군가를 만나는 걸 유메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항상 필요한 물건이 문 앞에 놓여 있을 뿐, 그가 대화하고 눈을 마주치는 사람은 자신이 유일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녀가 여기서 알아차린 바로는.
“이상해요.”
“무엇이?”
그가 그녀의 발목에 약을 발라주며 물었다. 기억을 잊은 날부터 지금까지 이 방에서 나가려는 자신을 그는 한 번도 나무란 적은 없었다. 단지 입꼬리를 한쪽으로 비틀려 웃으며 ‘바보구나, 너는.’ 라고 중얼거릴 뿐. 낮고 작게 울리는 그 말은 마치 차가운 은의 칼날이 목 뒤에 닿은 것처럼 그녀를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칼날이 그녀를 상처 입힌 적은 없었다. 신체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단지 몸 깊숙이 심겨있던 반사작용처럼 어깨가, 눈이, 심장이 가만히 있지 못할 뿐이었다. 그것이 긍정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지만.
“지금 이 상황... 우리의 관계 말이에요. 저는 당신을 모르겠어요. 저 자신에 대해서도 기억이 나질 않고요. 그러니...”
“이 엔딩을 선택한 건 너라고 말했을 텐데.”
다시 날카롭게 얼려진 목소리에 유메의 몸이 굳어졌다. 차갑게 오직, 오로지 자신만을 담아 얼린 그의 연하고 탁한 갈빛의 삼백안은 그대로인 채, 그는 씩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리고 게임에서 이기고 싶다면 컴플리트 조건을 달성하라고.”
“게임이라니... 그렇게 말씀하셔도...”
“너는 일부러 지신을 불리하게 하고 있어.”
그의 말에 유메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포식자를 피하려는 작은 동물처럼 슬 다리를 뒤로 빼려고 하자 그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곤 스르륵 그녀의 종아리, 허벅지를 손으로 쓸어 올리며 몸을 끌어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숨결과 시선이 얽혀 드는 사이를 견디지 못한 그녀가 고개를 숙이려는 걸 그가 손으로 잡아 막았다.
“그... 저.. 전...”
“잊을 거라면, 완벽하게 지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곳은 아무런 틈이 없는 고요였으나, 조금만 건드리기만 해도 어딘가 터져 흘러넘칠 숨 막히는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곧 알게 될 거야. 시간제한은 다가오고 있으니까.”
그녀의 불안이 작게 파문을 일며 공기 속에 녹아 들어갔다. 찰랑, 오늘도 아슬아슬한 고요함은 지켜졌다.
불온도 반복되니 일상으로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유메는 눈을 뜬 그 날 이후로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다.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 막막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이 현실을 꿈처럼 생각하고 있는 걸까. 정작 눈을 감은 뒤 절단된 기억과 시간을 건너 만나는 것은 언제나, 겨울 새벽과도 같은 그의 무표정이었다. 그가 손으로 자신의 뺨과 눈가를 어루만질 순간마다 그녀는 두려움과 안심을 느끼며 동시에 좌절했다. 그녀는 하루하루 자신이 마모되어가는 걸 느낄 때마다 커튼이 쳐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소용없어. 이 방은 방음이 잘 돼 있거든. 라벤더를 녹인 것 같은 눈동자가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빛을 응시하면 그는 으레 그렇게 말했다. 네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러면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눈 따위, 부시지 않았음에도.
어느 날은, 끈적거리는 모노크롬의 공기로 가득 찬 이 공간에 조금은 색다른 이물질이 들어온 적이 있었다. 유메가 눈을 뜨니 처음의 밤처럼 그의 백발이 달빛에 반사되어 아스라이 빛나고 있었다. 책상 앞 의자에 몸을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마시는 모습, 진하고 감미로우며 따뜻한 향. 그녀는 그가 자신 이외의 것을 대할 때의 표정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여전히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았으나, 평소의 그보다 안정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닿아와 이젠 자신의 일부처럼 느낀다는 걸 알 수 있는 분위기. 커피를 좋아하는 거구나, 하고 그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커피... 좋아하시나 봐요?”
스멀스멀 가슴 안쪽에서 타고 올라오는 정체 모를 역겨움을 떨치려고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싫어하지는 않다만... 오늘은 예정보다 23분 12초 늦게 일어났군.”
그는 잠시 머그잔 안 짙은 고동색 액체에 비친 자신을 응시하다 힐끗 그녀를 보았다.
“어떻지?”
“네? 아.. 몸 상태라면 조금 찌뿌둥한 거 빼고는...”
“아니야.”
그는 책상에 컵을 내려놓곤 침대에 반쯤 일어나 있던 그녀에게 걸어갔다. 그리곤 자신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그녀를 감싸 안듯 몸을 숙여 두 팔로 가두어 놓곤 조용히 속삭였다.
“메모리에 관한 것 말이야. 나에 대한 것, 떠올렸나?”
급작스레 가까워진 그의 향에 유메는 잠깐 숨을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 코끝을 감돌던 커피의 향, 희미하게 비에 젖은 풀냄새, 그리고 빛바랜 사진 같은 낯익은 향기. 어지러이 섞이는 향들에 그녀는 잠시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니요...”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그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을 외면하는 유메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살며시 그를 바라보았다. 새삼, 그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건 처음이 아닐까 생각하며, 그녀는 천천히 그를 보았다. 얇은 선으로 그린 것 같은 몸에도 볼록이 튀어나온 목젖, 다물어진 입술과 밤의 희미한 빛으로 하얗게 빛나는 콧등. 그리고 탁하고 흐리게 자신을 가두었던 눈동자. 그녀는 무심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가, 창가의 화병에 꽂힌 것을 보았다.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이 드는 방과는 대조적인, 작고 노란 들꽃의 다발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저것도 기억에 없는 건가?”
유메는 어느새 자신을 바라보는 그와 눈을 맞추었다. 이번에도 똑바로 자신만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웠다. 가슴에 손을 얹어 작게 심호흡을 한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군...”
침대보를 쥔 그의 손에 힘줄이 도드라졌다가 이윽고 사라졌다. 그는 몸을 일으키곤 책상 서랍에서 짧은 향초를 몇 개 꺼내 성냥으로 불을 붙여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놓았다. 유유히 퍼져나가는 연기에 그녀는 점점 정신이 몽롱해졌다. 갑자기 침대에 더해지는 그의 무게에 유메는 정신을 차리려 몸을 최대한 뒤로 빼보았지만, 그에게 양손을 잡혀 균형을 잃곤 그대로 쓰러졌다.
“네가... 계속 그럴 생각이라면 나에게도 방법이 있어.”
“.... 아파요. 놔 주세요.”
“그러면 내 이름을 말해.”
“몰라요... 저는, 당신의 이름을 몰라요.”
“그렇군. 아쉬워.”
그대로 그는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변명도 부정도 허용하지 않는 얽힘이 농밀하게 그녀의 치열 구석구석을 훑었다. 힘겨워진 호흡에 그녀가 상체를 비틀 때마다 더 깊게, 더 밀착해서 그는 그녀의 혀와 입술을 빨아들였다. 이윽고 얇은 선이 이어졌다가 끊어지자 그녀가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언제 여기를 나갈 수 있는 건가요?”
“말했잖아. 엔딩 변경조건은 네가 게임에서 이기는 것. 조건을 채우지 못하면 나의 승리야.”
“이런 것이... 당신이 원하던 결과인가요?”
“....”
드물게 그가 그녀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대답을 갈구하는 그녀의 눈빛에 조금씩 힘이 실리자 그가 나지막하게 웃으며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갔다 대었다.
“아니, 아니지. 내가 원하는 보상은 이런 게 아니야.”
간질간질하게 닿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의 어깨가 흠칫하고 떨렸다. 그 모습에 그는 작게 웃어대며 더 가까이 다가가 뜨거운 글자 하나하나를 한 잎 한 잎 뜯어내어 그녀의 귀 안에 넣었다.
“기대하고 있어. 이제 곧 마지막 스테이지다. 거기서 반전을 꾀해보자고. 너도, 나도.”
나도?
게임의 대상에 그도 포함되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의 관계는...
더 이상 생각할 틈도 없이 목덜미에 퍼부어지는 키스에,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3. Last stage
그날은 모든 것이 묘했습니다.
우선, 일어났는데 주변이 환했던 것부터가 그랬습니다. 낮에는 항상 두꺼운 커튼으로 밖이 가려져 있었는데, 그날만은 커튼이 거둬져 있어 밖의 풍경이 보였어요. 비록 구름이 두껍게 깔려있어 커튼을 친 것과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바깥 풍경이 저는 새로웠습니다.
“일어났나? 빨리 준비해.”
그다음은 그가 저에게 재촉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그는 저에게 기억을 되찾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었는데 말이죠. 저는 불안해하면서도 그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가 평소와는 다르게 들떠 보였기 때문입니다. 씻고, 옷을 갈아입자 그가 저에게 구두를 신겨 주었어요. 진한 초록색의 메리제인. 저는 영문을 몰라 그와 구두코를 번갈아 보았습니다. 감사를 전해야 하는 걸까 하고 고민하던 찰나,
찰카닥. 제 족쇄의 잠금이 풀어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바라보았어요. 그러자 그는 상냥히 미소 지으며 저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저는 그의 손을 잡았습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습니다. 하긴 제겐 그와 ‘게임’이라는 것을 시작한 이후로 이상하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날은, 그가 저를 데리고 이 방을 나와 처음으로 바깥에 나갔던 날은 특별히 그랬습니다.
지금도 종종 생각합니다.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어떤 것이 그와 나를 위한 최선의 행동이었을까, 하고.
“어때? 뭔가 떠오르는 것이라도 있나?”
그가 저를 데리고 간 곳은 성 근처에 넓게 펼쳐져 있는 꽃밭이었습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내뿜는 은은하고 달큰한 향들이 깔린 곳에서 그는 저의 손을 놓았습니다. 구름이 빠르게 겹쳐 어두운 하늘을 드리우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조금 세차게 불어오는 가운데서 저는 마치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그를 보았습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팔짱을 끼곤 예의 비틀린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가 봐.”
“네?”
저는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어 되물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한번 까딱거리곤 이번엔 조금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 나를 피해 도망치던, 여길 벗어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갑자기... 그게 무슨...”
“아니면, 이 상태로 다시 나와 함께 돌아갈 건가? 나는 그래도 상관없지만, 역시 그래선 시시해져 버리잖아?”
게임이.
라고 그는 뒤에 덧붙였습니다. 게임. 그 말을 들으면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이 느껴집니다. 발밑이 흔들리는 것 같은 감각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신겨준 구두와 아마도, 제가 모를 이름의 꽃들이 피어있는 게 보였습니다. 아, 저건 얼마 전에 화병에 꽂혀있던 거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순간 모든 것이 어지러이 뒤섞였습니다. 그에 대한 것, 자신에 대한 것, 향초, 꽃, 그 방, 그리고 이 게임.
그가 저를 향해 한 발짝 걸어오자 저는 두 발짝 뒷걸음질 쳤습니다. 시선은 그대로 밑을 향하며 저는 떨려오는 몸을 가까스로 유지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습니다. 지금 그와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고 머릿속에서 누군가 다급히 소리쳤습니다. 지금.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그 방에 돌아가지 않을 방법은 이제 이것밖에...
저는 뒤를 돌아 달렸습니다. 절대로 뒤를 돌아봐선 안 돼. 앞으로 가는 거야. 여기만, 이 머리 아프도록 달콤한 공기에서만 벗어난다면.
멀리서 우르르 천둥소리가 들린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어요. 천둥이나 번개, 비바람이 무서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웃고 있었어요.
저를 놔주면서 그는 미소 짓고 있었습니다.
심장이 불안하게 울렸습니다. 앞으로 가지 않으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저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던 그의 모습이 자꾸만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렸습니다. 점점 크게 울려오는 심장 고동 소리에 저는 귀를 막았습니다. 우르르 쾅. 이번엔 확실히 천둥이 친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번엔 눈을 꼭 감았습니다. 떠올리지 마! 기억하지 마! 잊는 거야. 완벽히.
뒤를 돌아봐선 안 돼.
그 찰나에 저는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아니. 정확히는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난 후에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멀리서 작아져 보인 그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모든 것이 하얗게 점멸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커피, 후계자, 암살, 미끼, 호감도, 꽃. 서로 관련이 없을 단어들이 뱅글뱅글 돌아 문장을 만들었습니다. 안 돼. 안 돼. 아, 나 때문이야 내가... 내가,
그에게 거짓말만 하지 않았어도.
“드라이!”
유메는 그의 이름을 외쳤다.
“드라이! 드라이... 안돼요... 제발.. 제발..”
그녀는 그에게 달려갔다. 계속 떨려오는 다리와 손을 겨우 움직여서 그녀가 한번 떠나가고자 했던 그에게 달려갔다. 등 뒤에선 계속 식은땀이 흘러내리다 아까보다 더 세차게 부는 바람에 빠르게 식었다. 눈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그가 흐릿해질 때마다 두려웠다. 곁에 있어 줘야 했는데. 계속 그 방에 있어야 했는데. 나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진정 자신이 하고 있는지도 모를 후회를 계속 중얼거리며 그녀는 그에게 달려갔다.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짓말 같은 거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드라이...”
유메는 쓰러져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감고 쓰러져 있는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이 창백해 보여서 마치 도자기로 빚은 인형 같았다. 꽉 조여 오며 쿵쾅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부여잡으며 그녀는 주저앉았다. 침착, 침착해야 해. 속으로 계속 되뇌며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았다가 떴다. 가쁜 호흡을 진정시키며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으나 눈에 띄는 외상은 없었다.
“드라이...?”
의문이 담긴 목소리가 허공을 떠돌자 쿠국, 몸을 둥글게 말고 쓰러져 있던 인형이 소리 내 움직였다.
“크흣... 크하하하하!”
몸을 들썩이며 웃던 드라이가 슬 눈을 떠 유메를 바라보았다. 멍하니 입술을 살짝 벌리고 자신만을 바라보는 그녀가 그는 퍽 만족스러웠다.
“이 게임도 내 승리로군.”
4. This game is mine.
드라이는 뒤돌아 달려 나가는 유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떠나기 전에 보였던 동공의 확장과 호흡의 불안정으로, 그는 확신했다. 그녀는 뒤돌아볼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돌아오겠지. 이번에야말로, 네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런. 그는 새어 나오는 즐거움을 숨길 수 없었다. 정말, 유메 너는 나를 즐겁게 해주는 데엔 천재야. 하지만 이번 게임의 난이도는 조금 심했어. 무엇이 심했냐는 것엔 답을 내리지 않은 채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살랑, 비 오기 전의 바람으로 인해 작고 노란 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꺾어왔던 이 꽃의 다발을 보고 그녀가 동요했는지 당황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을 떠올렸다. 유메의 모든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자부하는데도, 그것을 바라보는 그녀가 무얼 생각하며 느꼈는지는 물음표인 그대로였다. 그리움? 슬픔? 후회? 아니면 일말의 기쁨? 그 무엇도 아닌 것 같기도 했고, 그 모든 것인 것 같기도 했다. 날 바라볼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뻔히 보이는데 말이지. 무섭다, 도망가고 싶다, 들키면 안 된다. 그리고 괴롭다. 드라이는 유메가 자신을 향해 웃어준 것이 언제였던가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반지에서 깨어났을 때와 그녀를 대접한다는 자리에서 자신을 보고 지었던 그녀의 웃음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여태껏 속마음을 감추기 위한 가면은 지겹도록 보아왔다. 포커페이스 들추기는 그다지 재미있는 게임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놓고 악의와 적의를 드러내는 것이 스릴이 있어 즐거웠다.
하기야 그때의 어색함을 감춘다고 네가 지었던 웃음도 너무 어설퍼서 나름대로 재미는 있었지만.
「예쁜 꽃이네요. 향이 참 좋아요...」
처음은 단순한 놀라움이었다. 자신에게 그렇게 무방비하게 가까이 다가온 것도, 투명하게 속마음을 그대로 내비치는 웃음도 그에겐 낯설었으니까. 그래서 이용하기로 했다. 어쨌든, 그땐 미끼가 필요했다.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향이거든요.」
두 번째는 이상함이었다. 이상한 사람. 자신이 미끼로 사용됐다는 걸 알면서도 고맙다고 말하는 사람. 게임을 위한 단순한 트릭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
기분이 이상해. 안쪽에서부터 뭉클거리는 것이 뒤틀려, 머리가 어지러운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신경 쓴 적 없었던 그 꽃의 향기에 네가 떠오르는 현상.
에러? 버그? 모르겠어. 이해할 수 없어. 너는 어째서 나를 감싸는 거지?
「드라이는 어떤 것을 좋아해요?」
세 번째가 되고서야 알았다. 그런가. 너는 나를 공략하려고 했구나. 그러니 나를 감싸고, 나에 대해 알려고 한 거야. 생각할수록 웃음만 나왔다. 이 나를? 공략해 보겠다고? 그런 사람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어. 하지만, 그렇군. 확실히 그런 너의 발상은 재미있어. 요즘은 지겨운 게임들뿐이었으니까.
그러니 너도 즐기게 해 줄게. 하지만, 이 게임의 승자는 나야.
“언제나 말이지. 유메, 너는 나를 이길 수 없어.”
드라이는 주머니에서 작은 리모컨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이 게임은 말이야, 어떤 루트로 가든 내가 이기게 되어있어.
그는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평소보다는 조금 천천히.
유메의 정신상태가 피크가 될 때까지 앞으로
3...
왜냐하면 내 보상은 단순히 ‘너를 내 곁에 붙들어둔다’가 아니거든.
그는 두 개의 버튼을 엄지로 톡톡 번갈아 가며 살짝 두드렸다. 위와 아래, 어디를 누르던 자신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었다.
2...
‘네 메모리 안이 오로지 나로만 채워진다.’ 이게 내가 바라는 보상. 혹시, 네가 나를 돌아보는 것이 내 예상과 0.01초라도 엇나간다면... 나는 다른 의미로 네 안에 영원히 남겠지. 자, 유메. 너는 어느 쪽을 원하지? 선택지 정도는 네가 고르게 해 주겠어.
1
어차피 승자는 내가 될 테니.
Easter Egg
저는 결국 그 방에 돌아왔습니다. 드라이와 함께. 다시 발목엔 족쇄가 채워졌고 바깥으로 향하는 문이 열릴 일은 이제 영원히 없겠지요.
“어때? 이번 엔딩은 마음에 드나?”
그가 쿡쿡거리며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래요... 이건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였습니다. 그와 자신을 속인 책임의 대가. 저는 받아들여만 했습니다.
“너에겐 쭉 배드 엔딩 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는 오랜만에 게임을 즐길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그의 손이 제 목덜미를 쓰다듬다 스르륵 머리칼을 한껏 쓸어내렸습니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얽히는 머리카락의 감각마저도 이제는 제 것이 아닌 느낌이 들었어요. 힘이 빠져 침대에 걸터앉자 예의 그 꽃병이 보였습니다. 약간 시들해 보였지만 샛노란, 그 향기는 그대로였습니다. 그걸 깨닫고 나니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멀스멀 연기처럼 저를 채워갔습니다.
“그래서? 너의 감상은 어떻지?”
여전히 게임의 여운에 빠진 그는 제 귓가에 다가와 낮게 속살거렸습니다. 저는 어떻게 돼버린 걸까요?
저는 조심스레 양팔을 들어 그를 안았습니다. 그가 웃음을 멈추며 몸이 약간 경직되는 걸 느끼자, 제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습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드라이.”
“.... 할 말은 그것뿐인가?”
저는 아니라는 뜻을 담아 조금 더 힘을 주어 그를 껴안았습니다. 이 결말이 배드 엔딩이 되지 않는 방법에 대해 저는 쭉 고민해 왔습니다만, 어쩌면 이것이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드라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니면, 오히려 그와 쭉 끝나지 않는 게임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드라이가 당황한 건지, 웃고 있는지 그의 얼굴을 등지고 안고 있는 저로선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를... 사랑하시나요?”
아, 저는 그와의 게임을 즐기게 되어버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대답이 기다려지는 것도, 그가 지금 저를 힘주어 껴안는 감촉도, 이 방을 휘감고 있는 꽃의 향기도... 저는 이제 잊을 수 없으니까요. 잊지 않을 테니까요.
'2차 연성 백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을빛 그림자-드라히메 조각글 [꿈왕국] (0) | 2020.02.26 |
---|---|
거짓 미만 진심 이상(크레토히메) [꿈왕국] (0) | 2020.02.26 |
Who is in Wonderland (전자목록) [어마금] (0) | 2020.02.26 |
가정법 (전자목록) [어마금] (0) | 2020.02.26 |
빛, 그림자. (통행금지) [어마금] (0) | 2020.02.26 |